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30분가량 달려 도착한 레드우드 시(市)의 5층짜리 건물. 33㎡(10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에서 김동신(36)씨가 전화기를 들고 고객과 상담 중이었다. "딱 1분 30초면 당신 회사의 앱에 채팅 기능을 넣을 수 있다. 우리가 방문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우리 인터넷 홈페이지에 와서 파일만 다운로드받으면 된다." 이날 김씨는 영업 담당인 케시 펩파드와 함께 온종일 10여 개 회사와 상담을 했다. 그는 "상담한 회사의 절반 이상이 일주일 내로 계약서를 보내온다"고 말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나온 김씨는 올 초 이곳에 센드버드(Sendbird)라는 벤처를 설립했다. 3년 전 한국에서 창업했다가 본사를 옮겨온 것이다. 직원 수 15명에 불과하지만, 미국·인도·중국 등 20여 국에 2500여 기업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수조원대 매출을 내는 웬만한 국내 대기업보다 더 많은 해외 기업을 고객으로 둔 것이다. 그는 "최종 목적은 페이스북이나 구글처럼 세상을 바꾸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를 상대로 '글로벌 창업' 바람

젊은 벤처 창업자들이 글로벌 무대로 도전 영역을 넓히고 있다. 해외에서 창업을 하거나 창업은 한국에서 하더라도 처음부터 해외를 공략 시장으로 삼는 것이다.

뉴욕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 은 '눔 코치' 등 건강관리 앱 3~4개를 앞세워 지난달 말 전 세계 이용자 수 4300만명을 확보했다. 작년 말 2100만명에서 10개월 만에 2배로 성장한 것이다. 건강관리 앱 분야에서 3년 넘게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눔은 정세주(36) 대표가 구글 수석엔지니어 출신인 아텀 페타코브와 공동 창업했다. 정 대표는 "미국에서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을 만나, 전 세계에 통용될 비즈니스 모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젊은 창업자들이 세계로 도전 무대를 넓히며 글로벌 창업에 나서고 있다. 세계 건강 분야 앱 1위인 눔의 정세주(앞줄 오른쪽 끝) 대표가 휠체어를 탄 마크 사이먼 시니어엔지니어 등 뉴욕 본사 직원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사이먼 엔지니어 옆에는 회색 옷을 입은 구글 수석엔지니어 출신의 아텀 페타코브 공동 창업자가 서 있다.

서울에서 설립된 음악·공연 분야 스타트업 마이뮤직테이스트는 지난 2년간 파리·샌프란시스코·엘살바도르·헬싱키 등 32개 도시에서 130여 회의 음악 공연을 열며 '깜짝 스타'로 등장했다. 마이뮤직테이스트는 80여만 명의 전 세계 음악팬을 온라인으로 묶어, 이들에게 공연 요청을 받아 세계 각 도시에서 공연을 개최한다. 이 과정에서 특정 지역만의 인기 있는 뮤지션을 발굴하는 일도 한다. 연간 260억달러(약 30조원) 규모인 음악 공연 시장이 최고 스타의 대도시 공연에 집중된다는 상황에서 틈새시장을 창출한 것이다. 마이뮤직테이스트의 이재석(32) 대표는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는 음악팬 86만명 중 97%가 해외에 있다"고 말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4년 전 설립된 화동미디어는 스마트폰 잠금화면 앱 '머니라커'로 중국에서만 7000만명의 이용자를 확보했다. 머니라커는 잠금화면에 광고를 띄워 이용자가 이걸 볼 때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쓸 수 있는 적립금을 주는 서비스다. 화동미디어는 푸단대(復旦大)를 졸업한 강민구(29) 대표가 25세 때 중국인 지인 2명과 함께 설립했다. 강 대표는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마윈과 같은 창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큰 시장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수학 교육 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노리는 한국인 4명과 미국 교포 1명이 뉴욕에 세운 스타트업이다. 노리의 강점은 학생들이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생성된 학습 데이터를 습득해 이후 각 개인에 맞는 커리큘럼을 제시하는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 기술이다. 현재 미국 공립학교 80여곳과 북미 1위 교육 업체인 실반러닝이 노리를 수학 교재로 채택했다. 막 열리기 시작한 수학용 디지털 교재 시장을 선점하고 나선 것이다. 김서준(32) 공동 창업자는 "연내 중국 교육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라며 "미국·중국을 잡아, 세계 디지털 수학 교육 시장에서 1위로 올라설 것"이라고 말했다.

'창업=글로벌' 떠올리는 신(新)창업세대의 등장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회사 포메이션그룹의 이진만 이사는 “이전 창업세대와는 다른 유전자(DNA)를 가진 창업세대가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벤처 1세대인 네이버·다음·카카오·싸이월드·엔씨소프트 등은 ‘한국 시장’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최근 창업하는 벤처인들은 처음부터 해외 공략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 창업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의 ‘K-글로벌 스타트업 공모전’ 지원자도 6년 전 87개 팀에서 작년 878개 팀으로 10배 정도 늘었다.

신세대 창업자들은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장악하지 못하면 한국 내수 시장도 못 지키고 결국은 빼앗긴다”고 입을 모았다. 2000년대 초반 인기를 끈 친구찾기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 싸이월드가 페이스북에 밀려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센드버드의 김동신 대표는 “미국을 무대로 삼은 이유는 미국에서 팔리는 제품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인정받고 시장을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창업 세계에서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신(新)창업세대는 시작 때부터 외국인과 공동 창업하는 등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다.

미국 새너제이주립대의 박태호 교수(기업·기술경영센터장)는 "숙박 공유 사이트 에어비앤비 등을 키워낸 미국의 대표적인 창업 투자 기업 와이콤비네이터가 최근 2~3년 사이 한국 스타트업들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리고 있다"면서 "한국 벤처들이 이런 점을 잘 활용하면 충분히 해외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