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를 하며 보내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받은 수면제를 모아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감독 이소현)은 할머니의 자살 기도 소식을 접한 손녀의 독백(獨白)으로 시작한다. 영화감독인 손녀는 무작정 카메라를 챙겨 시골집으로 달려간다. 어쩌면 몇 해 남지 않았을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서다. 아흔 넘어서도 정정했던 할머니가 '왜' 자살을 시도했는지 그는 묻지 않는다. 손녀를 만나 함박웃음꽃이 핀 할머니의 얼굴을 오랫동안 클로즈업해 비출 뿐이다.

단역이나 조연에 불과했던 노인이 콘텐츠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유가 달갑진 않다. 한국 사회가 급격한 고령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노년의 불안정한 삶이 흔해졌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662만4000명으로 전체 인구 100명 중 13명꼴. 한국보건사회연구소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 10명 중 8명이 만성질환을, 3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노인 자살률도 10만명당 55.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자살률 12명의 5배에 달한다. 콘텐츠가 다루는 '노인 문제' 역시 질병이나 고독, 가난에 대한 노인들의 공포와 절망이 주(主)를 이룬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시대에 접어들면서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문화 콘텐츠도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이들이 조명한 비참한 노년(老年)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쉬이 넘겨선 안 될 누군가의 현실이자, 모두의 미래다. 사진은 박카스 할머니의 시선에서 노인 문제를 다룬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최근 개봉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는 노인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다각도로 다룬다. 종로 일대에서 '죽여주게 매춘 잘하는 여자'로 소문난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은 옛 단골 재우(전무송)와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 '산송장'과 다름없어진 옛 고객들과 차례차례 재회한다. 자식의 냉담과 싸우는 돈 많은 노인, 치매 걸린 채 단칸방에서 죽어가는 노인, 처자식 없는 고독한 삶에 공허함을 느끼는 노인을 만난 소영은 탈출구가 죽음뿐인 이들의 목숨을 끊어준다.

노풍(老風)은 드라마와 연극 무대도 비껴가지 않았다. 얼마 전 종영한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이하 디마프) 3화에선 망상장애 진단을 받은 조희자(김혜자)가 차도로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한다. 미수로 끝난 자살을 두고 "왜 죽으려 했느냐"는 친구들 질타에 그는 "치매 걸리면 우리 착한 아들도 결국 화낼 거다"라며 쓸쓸히 창밖을 응시한다. 국립극단 작품 '아버지'는 치매로 시공간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70대 노인 앙드레(박근형)의 내적 혼란을 그린다. 입 벌린 채 의자에 기대 잠들기 전 그는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독백한다.

‘황혼의 청춘’을 다룬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흥행에서도 선전했다. 고령화를 숙제처럼 그려낸 이들 콘텐츠에 대중이 공감한 덕이다. 저예산 영화인 '죽여주는 여자'가 관객 수 10만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디마프'는 최종회 시청률 8.1%(닐슨코리아·유료플랫폼 기준)를 기록했다. 서울극장에서 '죽여주는 여자'를 관람한 정혜원(47)씨는 "남 이야기로 치부하기보단 머지않은 미래로 감정이입해 영화를 관람했다. 생애 끝에 나 혼자 남는다면 저렇게 '죽여주는 여자'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노인층을 적극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점은 한계로 남는다. 노년 세태를 날카롭게 적시한 만큼 커져 버린 '불편함'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평이다. 드라마평론가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현실도피 내지는 대리만족 수단인 문화 콘텐츠가 불편함을 준다면 이를 감수할 시청자는 많지 않다. 특정 연령층에게 시청을 강요하기보단 모든 세대가 사회에 닥친 문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상식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상식화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디마프' 홍종한 PD는 "기획 단계부터 전(全)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민이 많았다. 삶이 처연하게만 보이지 않도록 연출했다. 1년 넘는 준비 기간 동안 노년의 삶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소통 창구를 마련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비참한 노년의 삶을 다룬 콘텐츠는 젊은 층엔 생(生)의 의미를 돌아보는 기회를, 중·장년층에겐 언젠가 맞닥뜨릴 초라한 미래를 준비시킨다"며 "이런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생산·소비돼야만 노인을 외면하는 사회 풍토가 점차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