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4시 서울 강남구 청담사거리. 이곳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품 거리’다. 사거리 초입 ‘버버리’를 시작으로 ‘디오르’, ‘구찌’, ‘루이뷔통’, ‘돌체 앤 가바나’ 등 고가품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대표매장)가 줄줄이 이어진다. 인근에는 ‘리스토란테 에오’, ‘팔레 드 고몽’, ‘레스쁘아 뒤 이부’ 등 요식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매장이 숱하게 자리를 잡은 ‘미식(味食)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 사거리에서 학동 방향으로 100m만 발걸음을 옮기면 ‘P 주상복합 레지던스’가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떠오른 최순실(개명 후 이름 최서원) 씨가 독일에 가기 전까지 지냈던 주거지다. 최 씨는 이곳에서도 가장 넓은 10층의 386제곱미터, 117평짜리 집에 살았다. 매매가는 30억원, 월세가 1000만원을 넘어서는 최고급 레지던스다.

이 레지던스 1층과 지하에는 고급 식료품점과 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최 씨가 선호했을 법한 구조다.

◆ ‘SSG 푸드마켓 청담점’, 마트라곤 없을 것 같은 사거리 한복판에 자리잡아

무겁고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레지던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은 ‘슈퍼마켓’이 어울리지 않을 것같은 명품 거리인데, 문 하나를 열고 들어서면 익숙한 식료품점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온다. 최 씨가 자주 갔다는 SSG 푸드마켓 청담점이다.

평일 오후 4시임에도 매장은 예상보다 북적였다.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러 나온 주부들이 많아 보였다. 시끄럽게 호객행위를 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판매대 앞을 지키는 직원들은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직한 목소리로 시식을 권유했다.

SSG 푸드마켓 청담점 입구

SSG 푸드마켓은 신세계 이마트가 선보인 고급 식품관이다. 백화점 지하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수준의 식재료를 구비한 프리미엄 매장을 표방한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주도해 만든 고급 식품관으로, 2012년 7월 첫선을 보였다. 현재 SSG푸드마켓은 청담동과 목동, 부산 마린시티 등 3곳에만 있다.

청담점 매장은 카트를 밀고 일직선으로 쭉 따라가야 계산대가 나오는 ‘한일자(一)’ 구조다. 입구는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다른 ‘아파트 단지 내 마트’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식재료들이 나온다.

입구를 지나 두 블록쯤 지나자 와인과 치즈 매장이 나왔다. 와인 매장은 간소한 편이다. 1만원대부터 5만원대 와인이 주를 이뤘다. 10만원을 넘는 와인은 매장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담당 직원은 “1층으로 올라가서 마트 밖으로 나가면 비싼 와인을 모아놓은 와인 전문매장이 따로 있다”며 “(와인 전문매장이) 바로 옆에 있어 (고급화 전략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와인 코너를 지나 치즈가 보관된 ‘치즈 전용룸’으로 들어가자 백화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고가 제품들이 눈에 띄었다. 프랑스와 영국 일대의 고가(高價) 연성 치즈부터 스페인산 벨로타 이베리코 하몽(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의 뒷다릿살을 숙성해 만든 햄)이 줄줄이 눈을 사로잡았다.

가장 깊숙한 곳에는 프랑스산 푸와그라(거위 간)와 러시아산 캐비어(철갑상어 알)가 자태를 드러냈다. 캐비어 가격은 큰 숟가락으로 한 스푼 분량인 12g에 7만6000원. 담당자는 “진열품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는 다 팔렸다”고 말했다.

SSG 푸드마켓 청담점에서 판매 중인 푸와그라(거위 간·왼쪽)와 캐비어

◆ 해외 제철 식품 ‘눈길’…현재는 송로버섯 인기

요즘 식품은 패션만큼이나 유행이 빠르다. 매년 인기 식품 순위가 수시로 뒤바뀐다. ‘전통의 진미’ 푸와그라와 캐비어를 갖췄더라도 해외에서 인기를 끄는 제품을 곧바로 만나볼 수 없으면 경쟁 매장에 뒤처진다. 음식을 먹는 행위로 대리만족을 느끼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러한 소비 행태를 반영하듯 이곳에서도 해외에서 제철을 맞은 식품들로 구성한 코너가 눈에 띄었다. 9월부터 2월까지 제철인 송로버섯(트뤼플)을 사용한 송로버섯 바질페스토(잣과 허브를 넣어 만든 이탈리아 양념), 송로버섯 브루스케타 등 다양하고 이국적인 양념류와 자작나무 수액 음료는 ‘오피스텔 지하 마켓’에서 만나기에 다소 호사스러운 제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가령 송로버섯이 들어간 발사믹 식초는 캔커피 한 잔 분량인 250ml에 9만5000원. 2015년 가구당 월 평균 식료품 구입비 29만원의 3분의 1에 달하는 금액이다.

'SSG 장(醬)방'에서는 멸치와 새우, 전복 등을 갈아서 만든 천연조미료와 전통 장류, 강화 쑥초() 등을 팔았다. 9번 구워 만든 죽염은 250g에 7만7000원이지만, 음식재료보다는 건강을 위한 약으로 인식되면서 찾는 수요가 꾸준하다.

SSG 푸드마켓 청담점에서 판매 중인 송로버섯을 가공해 만든 제품

최 씨가 건강기능식품을 즐겨찾을 법한 나이임을 감안해 이곳 직원에게 최 씨가 평소 자주 찾았냐고 물었다.

“그 분 얼굴이 어디 본다고 기억될 얼굴인가요. 여기 보세요. 다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일부는 최 씨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이도 있었다. “평소에도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최 씨가) 몇 번 왔었다”고 말한 한 직원은 ‘구체적으로 최 씨의 인상이 어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즉답을 피했다.

그는 다만 “여기 자주 오는 분들 중에는 개성이 강한 분들도 많고, 아주 점잖아 보이는 분도 있다”며 “연예인들도 많이 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