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정재훈 원장은 중견기업과 인연이 남다르다. 그가 산업자원부(지금의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국장이던 2010년에 '중견기업'이란 단어를 처음 공론화했다. 그해 중견기업 육성 정책인 '세계적 전문기업 육성전략' 을 처음 수립하면서부터다. 정 원장은 "중견기업이란 용어 하나 새로 쓰는데도 중소기업중앙회가 6개월 동안 반대했다"고 말했다. 또 2012년 차관보 시절에는 산자부 내 중견기업 지원 전담조직으로 중견기업국(3개과) 신설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산자부 내 중견기업국은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기에 중소기업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재훈 원장은, '중견기업의 가장 큰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는 질문에 "국내 중견기업은 대부분 수익 극대화를 위한 설비투자에 집중해, 매출액 대비 R&D 투자가 저조하고, 그마저도 미래 수익을 창출하는 원천기술 개발보다는 당장 발생하는 수익에 초점을 둔 상용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중견기업 관련해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하는 역할은?

“KIAT는 중견기업 지원 전담 기관이다. 중견기업 대책을 처음 만들 때 KIAT 내에 중견기업 지원센터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이 KIAT의 중견기업사업단이 돼서 중소기업청과 손발을 맞춰 중견기업 정책 기획부터 R&D, 그밖에 중견기업이 커나가는 여러가지 사업들을 통합해서 지원하고 있다. 또, 중견기업이 된 뒤에도 글로벌 전문기업으로서 계속 뻗어나갈 수 있도록 ‘월드 클래스 300’ 프로그램을 통해 중견기업을 육성하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정재훈 원장은 “중견기업은 매출액 대비 R&D 투자가 저조하고, 그나마 추진하는 R&D 투자도 신성장동력 발굴보다는 기존 제품의 개량, 개선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중견기업들이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발전하는데 장애물이 있다면.

“수출 기업화가 시급하다. 국내 중견기업 2979개 가운데 75.3%인 2242개 회사가 내수 및 수출 초기 단계(수출 500만 달러 미만)다. R&D 투자 역시 매출의 1% 수준으로 외국에 비해 크게 낮다.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의 중견기업들이 대기업의 1차 협력사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대기업에서 주문하는 사양에 맞추어 생산하는 구조라서 독자적인 R&D 비중이 낮고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떨어진다. 앞으로 이들 중견기업들이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한 단계 발돋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고객 확보, 상품 개발, 수출 선 확보 등을 위해 독립적인 영역을 넓혀 가야 한다.”

한국 중견기업들의 R&D 투자 수준은 외국과 비교해 어느 수준인가?

“국가별로 중견기업에 대한 정의와 범위가 서로 달라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만, 기업의 고용자 수를 기준으로 중견기업 R&D 투자 비중을 비교했을 때 주요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중은 미국이 3.65%, 독일이 3.1%, 일본이 1,83%인데 비해 한국은 1.05%에 불과하다. 중견기업이 미래 수익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성장 동력에 대한 R&D 투자 비중을 높여 나가야 한다.”

독일의 히든챔피언(강소기업)이 우리 중견기업에 주는 시사점은?

“독일의 히든챔피언은 대다수가 가족기업으로서 중장기적 안목으로 전문화된 틈새시장을 공략해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대기업과 비교하더라도 뒤떨어지지 않는 인력관리(임금, 복지 등)로 종업원들로 하여금 자긍심을 느끼해 해줌으로써, 고급 기술인력 확보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중견기업들도 자신의 핵심역량을 파악해, 미래 시장에서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 확보하고 경영진과 직원간에 신뢰와 자부심이 쌓이도록 기업문화를 키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픽=이진희

중견기업의 가업 승계는 어떻게 보나?

“기업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책임은 기업 승계라고 생각한다. 회사를 키워 고용을 창출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기업가 정신이 없으면 기업가들이 가업 승계를 하겠는가? 야당을 비롯해 일부에서는 가업 승계를 ‘부의 대물림'이라는 부정적 시각에서 보지만 기업 상속이 돼야 고용이 늘어나고 기업의 성장판이 열린다고 본다. 다만, 가업 승계를 하려면 세금 부담이 큰데 정부에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중견, 중소기업에게는 혜택을 주고 있는데, 그 조건들을 다소 완화해서라도 가업 상속을 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 이왕에 만들어 놓은 기업을 한쪽에서는 허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기업을 육성해서 나아간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지금은 저성장 시대인 만큼 가업 승계가 잘 돼야 기업의 규모가 잘 유지되고 고용도 안정될 수 있다. 장기적인 R&D 투자 역시 가업 승계 토대 하에서 가능하다.”

한국 중견기업들 중에서 롤 모델이 될 사례를 몇 개 들어 달라.

"첫째, 자기 체형에 맞는 적절한 틈새시장을 잘 골라야 한다. 이미 대기업이 시장을 장악한 사업이거나 대기업이 쉽게 들어올 만한 비즈니스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경쟁하더라도 체급이 비슷한 기업끼리 붙어야 승산이 있지 않겠나. 가령, 보톡스의 경우, 휴젤, 메디톡스 같은 국내 기업은 이 시장에서 세계 5위 권에 들어 있다.
농생명 분야에선 사막화된 지형에서 자라는 유채꽃을 배양해, 기름을 생산하는 기업도 있다. 몽골의 청정지역에서 유채꽃을 재배해 식용, 에너지용 기름을 생산하고 있다. 원래 몽골은 기후가 험해 유채꽃이 자라기에 적절치 않은데, 빅데이터를 활용한 이종교배를 통해 사막화 지형에서도 잘 자라는 유채꽃 개발에 성공한 사례다. 이런 경우는 세상을 뒤흔드는 최첨단 기술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거나 아픈 곳을 낫게 해주거나 호기심을 만족 시키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본다.
하림이나 샘표식품 같은 경우는 양계(하림), 간장(샘표) 같은 전통 산업에서 출발했지만 본업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킨 사례다. 하림은 양계에서 시작해 닭가공, 육가공, 수출 등을 위한 해운업까지 영역을 넓힌 경우고, 샘표는 간장에서 시작해 종합식품회사로 거듭났다."

◆정재훈 원장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을 맡고 있는 정재훈 원장(56)은 매주 1개 기업 이상 현장 방문을 하는 '현장 소통형'이다. 2010년 지식경제부 산업정책국장 시절 '세계적 전문기업 육성전략'을 마련, 중견기업 육성 정책을 처음 수립해, 산업발전법에 지원 근거 등을 마련했다. 2012년 차관보 시절에는 산자부 내 중견기업지원 전담조직으로 중견기업정책관(3개과)을 신설했으며, 2013년에는 우리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기업 육성대책인 '중견기업 성장사다리 구축방안"을 마련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당시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 확대를 위해 기존 중견기업지원센터를 중견기업단(3팀 1TF)으로 확대 개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