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은 임신을 막을 책임은 남녀 모두에게 있다. 피임 기구인 콘돔에서는 이미 남녀 차별이 사라졌다. 여성용 콘돔인 페미돔이 개발돼 콘돔 착용을 꺼리는 남성이 많은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차단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머지않아 피임약에서도 성차별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남성용 먹는 피임약이 동물실험에서 잇따라 좋은 성과를 내면서 이르면 2년 내 시판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정자 이동 능력 차단해 피임 효과

지난 23일(현지 시각) 영국 언론들은 울버햄프튼대 존 하울 교수 연구진이 정자의 운동 능력을 저하시키는 남성용 피임약을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성관계를 갖기 전 수분 전에 이 약을 먹으면 피임이 가능하고, 며칠만 지나면 정자의 기능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부작용 때문에 피임약을 장기 복용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남성들도 때마다 콘돔을 찾지 않아도 원치 않는 임신을 막을 수 있다.

일레인 리스너 미국 파시머스재단 창립자가 남성용 피임약 베이슬젤이 든 유리병을 들고 있다.

하울 교수팀의 남성용 피임약은 아미노산 몇 개가 연결된 펩타이드이다. 그보다 더 많은 아미노산이 연결되면 단백질이 된다. 포르투갈 아베이로대의 인공수정 전문가들은 정자 꼬리가 움직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찾아냈다. 하울 교수팀의 펩타이드는 이 단백질과 결합해 기능을 막는다. 꼬리의 힘을 잃은 정자는 난자까지 가지 못한다.

연구진은 배양 접시에서 키운 소와 사람 정자에 펩타이드를 줬더니 정자의 운동 능력이 확연하게 떨어졌다고 밝혔다. 곧 포르투갈 정부 지원을 받아 2~3년간 살아있는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예정이다. 이후 인체 대상 임상시험까지 거치면 이르면 2021년에 남성용 피임약이 시판될 수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한 번 주사로 1년 약효 내는 약도

개발 과정이 더 빠른 남성용 피임약도 있다. 미국의 민간단체인 파시머스재단이 개발한 '베이슬젤(Vasalgel)'은 정자의 이동을 막는 약물이다. 고환에서 만들어진 정자는 정관과 요도를 거쳐 몸 밖으로 나온다. 정관에 베이슬젤을 주사하면 정관 내에서 양갱이나 묵 같은 상태가 된다. 정액은 베이슬젤의 미세한 구멍을 통과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정자는 가로막힌다. 정관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정자는 다시 몸으로 흡수된다는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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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머스재단은 지난 3월 토끼 수컷 12마리에 베이슬젤을 주사해 12개월 동안 피임 효과를 거뒀다고 발표했다. 이 중 7마리는 이후 베이슬젤을 없애는 물질을 주사했다. 그러자 바로 암컷을 임신시켰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2014년에는 원숭이 실험에도 성공했다. 파시머스재단은 올해 말부터 인체 대상 임상시험에 들어가면 이르면 2018년에 시판할 수 있다고 밝혔다.

베이슬젤의 장점은 한 번 주사로 1년간 피임 효과가 지속돼 매번 번거롭게 피임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또 연구진은 인체의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호르몬이나 생체 물질이 아니라 단순히 정자의 이동을 물리적으로 막는 물질이어서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50조원대 피임시장서 두각 보일 듯

남성용 피임약 개발은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당시 인구 억제 정책을 펴던 중국 정부는 면화씨에서 추출한 독성물질인 '고시폴'을 임상시험했지만 부작용이 심해 개발을 중단했다. 다른 남성용 피임약들도 잇따라 개발됐지만 상용화되지 못했다. 부작용도 문제였지만 당시에는 남녀 모두 남성용 피임약에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남녀 모두 절반 이상이 남성용 피임약을 복용하거나 복용토록 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시장이 무르익은 셈이다. 게다가 전 세계적인 에이즈 예방 노력에 저개발국의 핵가족화도 빨라지면서 피임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시장 조사 기관 얼라이드마켓리서치는 이달 초 전 세계 피임약과 피임 기구 시장이 지난해 281억7500만달러(약 31조 9000억원)에서 2020년 438억1200만달러(49조 6000억원)로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성용 피임약은 이 시장에서 큰 몫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