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왕관 보석(crown jewel)을 사들였다.'(뉴욕타임스).

미국 2위 통신업체 AT&T가 미디어 기업 타임워너를 854억달러(약 97조원)에 인수하기로 발표하자 미국 언론은 앞다투어 통신·미디어 업계 최대 공룡의 탄생을 전했다. 유·무선 통신망을 가진 AT&T가 핵심 콘텐츠를 확보했다는 뜻이다. 이번 인수는 1995년 만화 제작사 월트디즈니가 지상파 방송사 ABC를 190억달러(당시 환율로 14조8000억원)에 인수하면서 세계 미디어업계에 대형 M&A(인수·합병)의 물꼬를 튼 이래, 역대 최대 규모다. AT&T가 타임워너 인수·합병을 완료하면 두 회사를 합쳐 연매출 1700억달러(약 194조원)대의 거대 미디어 그룹으로 거듭나게 된다.

22일(현지 시각) 미국 외신들은 AT&T와 타임워너가 인수·합병에 합의했으며 두 회사의 이사회가 조만간 합병안을 통과시킬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합병 법인의 최고경영자는 랜들 스티븐슨 AT&T 회장이 맡을 것"이라며 "앞으로 연방통신위원회(FCC) 등 미국 규제 당국의 허가 과정을 거쳐 내년 말 인수가 완료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번 초대형 인수·합병은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미디어 업계의 재편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통신 자본까지 뛰어들면서 예전보다 더 거대해진 미국 미디어 기업이 세계 공략에 나서는 만큼, 각국 미디어 업체들도 규모를 키워 맞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미국의 독점 당국이나 FCC(연방통신위원회)가 인수·합병을 불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AT&T, 타임워너 인수해 버라이즌 넘어서나

타임워너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뉴스 채널 CNN, 미국 최대 유료 케이블 채널 HBO와 영화 제작사 워너브러더스 등을 보유한 미디어 업계 강자다. 연간 매출이 281억달러로, 컴캐스트(745억달러), 월트디즈니(524억달러)에 이어 미국 3위다. 인수·합병이 완료되면 흥행 보증 수표로 불리는 워너브러더스 제작 영화 '배트맨' 시리즈, '해리포터' 시리즈, HBO가 만든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이 AT&T로 넘어간다.

AT&T의 목표는 타임워너의 콘텐츠를 무기로 미국 통신 1위 버라이즌을 잡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사의 휴대전화 가입자에게 타임워너의 콘텐츠를 독점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이 회사는 현재 LTE(4세대 이동통신)보다 최대 1000배나 많은 동영상이나 영화를 실어나를 수 있는 5G(5세대 이동통신)의 상용화를 서두르고 있다. 통신망과 콘텐츠를 모두 움켜쥐면 버라이즌과의 정면 승부도 가능하다는 게 AT&T의 판단이다. 다만 AT&T가 보유한 현금이 현재 72억달러(8조2000억원)에 불과해 추가로 인수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국내에서 대형 M&A 촉발시킬 듯

이번 초대형 인수는 방송·통신·미디어·엔터테인먼트 간 장벽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신호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연매출 1468억달러(167조5000억원)의 통신업체인 AT&T가 타임워너를 품에 안으면 현재 미디어 1위 컴캐스트를 끌어내리고 단숨에 선두로 치고 올라간다.

여기에 2년 전 인수한 위성방송업체 디렉TV까지 합치면 통신과 미디어 산업 전반에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다른 경쟁자들도 맞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국내 방송·통신 시장에 M&A 바람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거대 글로벌 업체와의 경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국내 업체도 '규모의 경제'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미디어 업체는 미국에 비하면 영세 사업자 수준이다. tvN 등 인기 채널을 갖춘 CJ E&M조차도 미국 월트디즈니에 비하면 5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현재 국내 통신업계에서는 LG유플러스가 수천억원대 규모의 케이블 업체 인수를 검토 중이다. LG유플러스의 권영수 부회장은 최근 "법률 개정으로 통신업체가 케이블TV 업체를 인수할 수 있게 된다면 (인수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SK텔레콤은 케이블 TV 업체 CJ헬로비전 인수를 추진했다가 지난 7월 공정거래위원회의 불허 결정으로 철회했지만 언제든지 다시 M&A전에 뛰어들 수 있다. SK의 고위 관계자는 "이미 미국 유료 동영상 업체 넷플릭스가 국내에 진출한 상황에서 하루빨리 내부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미국 미디어 파워에 국내 시장을 뺏길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과학기술대의 최성진 교수는 "연내 통합방송법이 통과되면 내년부터 굵직한 인수·합병이 연이어 터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