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오후 서울 강남 카카오프렌즈 플래그십 스토어. 들어가지 못한 사람만 30여 명이다. 운 좋게 입장한 대학생 정일오(24)씨는 여자친구에게 선물할 '후라이' 인형을 집어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라이는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상품인 '후드 쓴 라이언'의 줄임말. 정씨는 "방문할 때마다 품절이라고 해서 재입고 날짜만 기다렸다. 예약은 불가능하고 재입고 날짜도 불명확해 중고나라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템(희귀한 물건)이었는데 오늘 드디어 손에 넣었다"며 활짝 웃었다. 카카오프렌즈에 따르면 15㎝(1만2000원), 60㎝(5만9000원) 두 종으로 발매된 '후라이'는 스무 차례 재입고됐고, 물량이 풀리는 족족 완판됐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강남 카카오프렌즈 플래그십 스토어에 몰려든 사람들. 폐장 시간인 오후 10시까지 1만5000여 명이 방문해 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사자 한 마리에 젊은 층이 열광하고 있다.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라이언(RYAN)'이다. 카카오 브랜드팀 디자이너 다섯명의 손에서 탄생한 이 캐릭터는 사자를 뜻하는 'Lion'과 비슷한 발음의 사람 이름을 붙였다. 제작 기간만 3년이 걸렸다. 첫선을 보인 건 지난 1월. 이모티콘 '헬로! 라이언'으로 출발해 두 달간 최다 판매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다. 35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판매량 상위 다섯 손가락 안에 꾸준히 자리하고 있다. 모바일뿐만 아니라 라이언을 활용한 쿠션과 인형, 파우치, 휴대폰 케이스 등 실물(實物) 상품도 인기. 노숙인이 판매하는 잡지 '빅이슈' 134호는 라이언을 표지 모델로 등장시켜 초판이 완판됐다. 부랴부랴 재판을 찍어 평소 2배인 2만5000부가 팔려나갔을 정도. 카카오 사원들은 온·오프라인 매출을 책임지는 살림꾼 라이언을 '라 상무님'이라고 부른다.

'후드 쓴 라이언' 인형, 일명 '후라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상품이 입고될 때마다 매진 사태를 빚는다.

동그란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무표정에 입이 없어서다. 수사자인데 갈기가 없어 사자보단 곰을 연상시키는 첫인상. 중성(中性)적이면서 귀엽다. 라이언 디자인을 총괄한 윤윤재 이사는 "나름의 개성으로 희로애락을 표현했던 기존 캐릭터와 달리 '무뚝뚝함'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다른 캐릭터 모두를 품어주는 '조언자' 느낌도 담으려 했다"고 했다.

감정 잘 드러내지 않는 남성들 마음도 사로잡았다. 직장인 신재천(26)씨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싶어도 쑥스러운 마음에 망설인 적이 많았다. 라이언은 성별이 불명확하고 표정이나 행동도 과하지 않아 사용하는 데 부담이 없다"고 했다. 여성들도 '모호한 성별'을 장점으로 꼽는다. 여성 직장인 김가현(27)씨는 "라이언은 귀여운 외모에 성별까지 불분명해 평소 친하지 않은 직장 상사나 지인에게도 부담 없이 사용한다. 이모티콘 초보자인 아빠도 내가 선물한 라이언 이모티콘을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신다"며 웃었다.

라이언 열풍은 일본 '단카이(團塊) 주니어 세대'가 이끈 '헬로 키티 현상'과도 닮았다. 전후(戰後)의 베이비붐 세대 '단카이'는 일본 고도성장의 주역으로 칭송받지만, 거품 경제를 일으켜 20년 장기 불황을 가져왔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단카이 주니어'는 이들의 자녀 세대로 소득수준이 높은 맞벌이 부모 아래 성장해 교육 수준은 높지만 경기 침체와 과열 경쟁, 고독에 시달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입이 없는 캐릭터 '헬로 키티'는 무엇이든 들어줄 것 같은 존재로 이 세대를 위로한 친구였다는 것. 술·담배를 제외한 전(全) 제품에 사용되는 '헬로 키티'의 자산 가치는 약 20조원, 연간 시장 규모는 3500억원에 달한다.

장기 불황과 취업난, 세대 갈등에 시달리는 한국의 젊은 세대도 위로가 필요하긴 마찬가지다. 이모티콘에서 울고 있는 친구 튜브(오리)와 제이지(두더지)를 다독이는 '라이언'이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프렌즈콘텐츠셀 천혜림 셀장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머지 친구를 챙기는 라이언의 '츤데레(겉으론 무심하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 이미지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산 것 같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문자나 음성언어 대신 '이미지'로 감정을 표현하는 젊은 세대가 특정 캐릭터에 열광하는 건 시대 정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며 "오프라인까지 번진 라이언의 인기는 이 캐릭터를 '친구'처럼 곁에 두고 싶은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소비가 이루어진 결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