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이 자리에서 이해진 네이버 의장은 코렐리아 캐피탈(Korelya Capital) K-펀드에 1억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코렐리아캐피탈은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설립한 벤처캐피털이다. 반면 이 의장은 국내 벤처 투자 계획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에도 공격적인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면서 “기회가 되면 얘기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국내 인터넷 벤처 1세대로 꼽히는 네이버가 후배 기업 양성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최근 10년 동안 국내 벤처 펀드에 출자한 금액은 1700억원에 그치기 때문이다. 중간 회수해간 금액을 제외하면 그나마 900억원도 남지 않는다. 10년 전 ‘첫눈’ 이후 눈에 띄는 인수합병(M&A) 사례도 없다. 다음과 합병한 카카오가 국내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인수하고 있는 것과도 비교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9월 30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코렐리아 캐피탈(Korelya Capital) K-펀드 1 출범 기자간담회에서 플뢰르 펠르랭 전 장관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김상헌 네이버 대표(왼쪽)와 이해진 네이버 의장.

◆ 국내 벤처 투자 재원 17조원...네이버 지분은 0.5%에 그쳐

네이버는 지난 10년 동안 NHN인베스트먼트와 함께 ‘스톤브릿지초기기업전문투자조합’과 ‘09-9한미신성장녹색벤처조합’ 등 20개 벤처 펀드에 총 1685억원을 출자했다고 13일 밝혔다.

벤처캐피털은 스타트업이나 벤처,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회사를 말한다. 네이버와 같은 유한책임출자자(LP)의 돈을 모아 펀드를 조성한 뒤, 이를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에 투자해 수익이 나면 LP들에게 다시 분배한다.

벤처 투자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네이버와 NHN인베스트먼트가 펀드 운용 도중 회수해간 금액을 제외하면 출자금은 866억원이 남는다. 네이버의 주머니로 다시 들어가고 남은 866억원은 지금도 벤처 투자 재원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국내 벤처캐피털 시장의 재원이 총 17조1121억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중 네이버의 기여도는 0.5%에 그치는 셈이다.

해외 벤처 펀드에 대한 10년 간 누적 출자 금액은 기존 출자액 777억원에 이번 K펀드1 출자 금액 1241억원을 더해 총 2018억원이 됐다. 국내 벤처 펀드에 대한 누적 출자액(1685억원)보다 333억원이 더 많다.

한 벤처캐피털리스트는 “현재 국내 벤처 펀드 대부분은 네이버와 같은 사기업이 아닌 정부의 정책 자금으로 조성되고 있다”며 “구글·페이스북과 같은 대기업이 벤처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미국과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IT 업계 일부 관계자들은 네이버가 유럽 벤처 펀드에 거액을 쏟아붓고 있는 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분석한다. 네이버가 글로벌 IT 시장에서 구글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구글의 반독점법 위반을 조사하고 있는 유럽연합(EU)에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펠르랭 대표가 프랑스에서 약 4년 간 장관을 맡은 만큼, 네이버가 코렐리아캐피탈과 손잡고 유럽 스타트업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할 경우 자연스레 반(反) 구글 진영에 합류할 수 있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 10년 전 ‘첫눈’ 이후 눈에 띄는 M&A 사례 없어…카카오와도 비교

네이버는 벤처 펀드를 통한 간접 투자가 아닌 직접 투자, M&A는 활발히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네이버는 지난 10년 간 액셀러레이터(초기 투자사) ‘네이버D2스타트업팩토리’, 자회사들을 통해 3606억원 규모의 지분 투자와 M&A를 해왔다.

대표적인 M&A 사례로는 지난 2006년 인수한 ‘첫눈’이 있다. 첫눈은 네이버의 검색 기술을 한 차원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첫눈의 핵심 개발자였던 신중호는 라인의 CGO(글로벌사업총괄)로서 핵심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첫눈 인수 사례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이렇다 할 M&A 성과가 없다. 카카오가 1조9000억원을 들여 로엔을 인수하고 626억원에 록앤올(내비게이션 ‘김기사’ 개발사)을 사들인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미국의 글로벌 IT 기업 구글은 자국 스타트업에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구글의 전문 투자사 구글벤처스(GV)는 현재 24억달러(2조7000억원) 규모의 벤처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구글벤처스는 현재까지 우버(Uber), 슬랙(Slack) 등의 스타트업에 투자했으며 네스트(Nest)를 32억달러(3조6000억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구글캐피탈 역시 2013년 설립된 이래로 매년 3억달러(34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 “스타트업 양성은 커녕 기술 베끼기 논란 잇따라”

벤처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벤처 생태계를 발전시켜야 할 네이버가 잇따라 스타트업 기술 베끼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며 비판한다. 지난 2013년 골목상권 침해 논란에 이어 또 다시 스타트업의 기술과 사업 모델을 표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가 지난 6월 선보인 ‘참여번역Q’는 사용자들이 직접 번역에 참여할 수 있는 서비스로, ‘플리토(Flitto)’의 사업 모델을 베꼈다는 논란을 낳았다.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김상헌 네이버 대표이사가 직접 나서 사과문을 올린 뒤 서비스를 종료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네이버의 얼굴 인식 카메라 앱 ‘스노우’는 스타트업 시어스랩이 출시한 ‘롤리캠’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네이버의 홈페이지 제작 서비스 ‘모두’가 모바일 솔루션 업체 네오패드의 기술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며, 10억원대의 특허권 침해 금지 청구 소송이 제기된 상태다.

국내 스타트업 S사 대표이사는 “네이버는 지난 2013년에도 스타트업의 사업 모델을 베껴 많은 영세 사업자들에게 상처를 줬는데, 최근 들어 또 다시 이런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며 “역량 있는 스타트업을 인수해 생태계 발전에 기여해도 모자랄 판에 실망스러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