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과 이순신과 임경업

1591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부임했을 때 처음 한 일은 군량미와 물자 확보였다. 남도를 순시하던 이순신이 순천 낙안읍성에 닿았다. 필요한 물자를 수레에 실은 일행이 떠나려는데, 은행나무 앞에서 수레바퀴가 빠져버렸다. 수리를 마치고 순천으로 가보니 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었다. 바퀴가 빠지지 않았다면 이순신이 건널 무렵 무너졌을 다리였다. 이순신을 살려준 은행나무는 지금도 낙안에 서 있다. 이순신이 죽고 28년 뒤 충주 사람 임경업(林慶業·1594∼1646)이 낙안군수로 부임했다. 임경업은 군인이다.

임진왜란 와중에 태어나 쉰두 살에 죽었다. 전쟁터가 아니라 곤장 100대를 맞다가 고문장에서 죽었다. 죽음도 불우했고 삶도 불우했다. 1626년 서른둘 나이에 전남 낙안군수로 부임할 때까지 임경업은 20대 젊은 장군으로 승승장구했다. 군 출신 군수답게, 흙성이던 낙안 성곽을 돌로 겹쳐 쌓았다. 읍성은 방어용으로 마을 전체를 두른 평지형 성곽이다. 왜구를 향한 남쪽 성곽은 더 높고 두껍게 쌓았다.

명청 교체기에 임경업은 국가 시책에 따라 청을 주적(主敵)으로 삼았다. 조정이 눈치를 보다가 청과 손을 잡았어도 임경업에게 적은 청이었다. 그래서 청나라가 명한 대명전투에서도 임경업은 명에 첩보를 흘리고 싸움을 피해 다녔다.

결국 임경업은 청으로 압송되다가 탈출해 표류 끝에 명으로 망명했고, 다시 끌려온 조선 땅에서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한때 후원자였던, 사육신을 고자질한 김질의 직계 후손 김자점이 그를 죽이라고 선동했다. 뛰어난 무장이요 지조의 화신 임경업은 변변한 전쟁 한번 못 치르고 간신배들 모략에 타살됐다. 그 흔적이 순천 낙안읍성에 있다.

야경 버스 손석화와 여수산단

여수산단 야경을 안내하는 손석화.

낙안에서 보성 벌교를 지나면 여수다. 전라좌수영, 그리고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도시다. 손석화(48)는 그 여수에 산다. 여수에서 밤마다 이순신광장에서 버스에 관광객을 태우고 밤거리로 들어간다. 손석화는 고향이 거문도다. 그가 말했다. "젊을 때 여수로 와서 별의별 일 다 하고 살았다. 나이트클럽도 하고 술집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IMF 때 거지가 되었고 사기꾼이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가진 일이 무면허 관광 가이드였다. 입담 좋고 사교적이라 손석화는 가이드 팁으로 빚을 갚고 사기꾼 누명도 벗어던졌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여수가 밤이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누님 집이 여수산단 옆인데, 밤에 그 조명이 너무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밤이면 공짜로 손님들 데리고 산단에 갔다. 2년 동안 공짜로 사람들 태워주고 설명해주고 다녔다. 속칭 '아재 개그'를 던지고 트럼펫과 색소폰도 연주하며 사람들 혼을 빼놓았다. KTX가 들어오면서 대학생들 태워줬더니 온갖 블로그에 손석화 얘기가 퍼져나갔다. 그가 말했다. "여수산단 불빛은 살아 있는 불빛이다. 보기 좋으라고 켜놓은 게 아니라 생산을 하고 대한민국을 밝히는 빛이다."

여수산단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을 앞세운 경제개발계획으로 생긴 산업단지다. 석유산업이 위주다. 24시간 돌아가야 하는 공장들이라, 밤에는 태양빛만큼 밝게 불을 밝힌다. 밤이 되면 노란 나트륨등, 창백한 메탈할라이드등이 별처럼 땅에서 솟아 바다를 밝힌다. 손석화가 운영하는 투어는 바로 이 지상 별빛에 집중돼 있다.

해가 지고 묘도 전망대에서 바다 건너 남쪽을 바라보면 여수산단 불빛이 보인다. 불빛이 별들처럼 밤바다를 밝힐 때까지 힘들고 고된 역사가 필요했다.

대한민국에 실망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여수산단을 봐야 한다. 지구촌 변방 대한민국이 무슨 경로를 거쳐 21세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이 비상사태 때 45일 동안 사용할 석유 저장고도 이곳에 있으니, '준비된 나라' 대한민국도 이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여수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서 21세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일본군 비행장 주둔 '여순사건' 14연대

이순신 이야기는 굳이 더 할 필요가 없다. 나라를 위해 살다가 모함으로 계급장까지 뜯겨나가고 고문당했던 무사. 사령관직에 복직해 전쟁을 치르고, 여수 앞바다에서 노량해협까지 적을 쫓다 전사한 무사. "왜 그는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나?" 의문이 들 만큼, 바보처럼 나라만을 위해 살다 죽은 군인이었다. 그 흔적이 여수에 다 있다. 그가 집무했던 전라좌수영 사령부 진남관, 그가 지휘했던 고소대, 거북선을 수리하던 선소가 여수에 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의 부대가 주둔했던 묘도에는 이순신대교가 섰다. 그 다리 아래로 이순신 부대가 출정했다. 반역을 꾀하지 않은, 우직한 장군 이순신 덕분에 모두 관광지로 변한 곳이니,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

이순신에 쫓겨간 일본은 20세기에 돌아왔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여수에도 해군부대를 주둔시키고 수상비행장을 세웠다. 비행장 건설용 철도 신월리선을 만들고 전쟁 막바지까지 조선인을 동원해 비행장을 건설했다. 세상 사람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땅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건설된 일본군 수상비행장터.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가 이곳에 주둔했다.

신월로 넙너리마을 너머 동성자동차학원 구내에는 신월리선 터널이 남아 있다. 터널에서 시내 쪽으로 1㎞ 정도 가면 해안도로 왼편에 제법 넓은 시멘트 공터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수상비행장 흔적이다. 깨지 않은 자갈을 시멘트와 섞어 만든 넓은 터다. 일본군 흔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일단 알고 난 이상에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게다가 바로 이곳이 1948년 여순사건 장본인인 14연대 주둔지였다는 사실까지 알면.

좌익 세력이 주도한 14연대, 4연대 반란은 여수와 순천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대한민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낙안읍성을 거쳐 지리산으로 올라간 반란군은 훗날 빨치산이 되었다. 14연대는 해체됐고 4연대는 20연대로 개명됐다. 그 흔적들, 300년 만에 돌아온 일본군 흔적과 여순사건 흔적이 이순신의 자취에 중첩된다.

좌수영대첩비의 비밀

좌수영대첩비. 원명은 ‘통제이공수군대첩비’다.

진남관에서 육교를 건너 천사벽화마을로 들어간다. 그 끝에 '김기수 체육관' 이정표가 나온다. 김기수는 대한민국 첫 권투 챔피언이다. 1·4 후퇴 때 흥남에서 내려온 김기수는 이곳에서 권투를 배워 1966년 챔피언이 되었다. 고흥 사람 유제두가 제자로 들어와 역시 챔피언이 되었다.

체육관으로 가는 골목 옆에는 고소대가 있다. 비각 안에는 비석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좌수영대첩비고 하나는 타루비(墮淚碑)다. 좌수영대첩비는 전라좌수영이 올린 승전을 기리는 비다. 타루비는 부하들이 훗날 만든 비석이다.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뜻이다.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는 1942년 여수경찰서장 마쓰키(松木)가 어디론가 가져가 사라졌던 비석이다. 해방되고 1년 뒤 엉뚱하게 서울 경복궁 뜰 땅속에서 발견돼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로 돌아온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파괴하지 않고' 묻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기네 조상의 참패에 대한 기록이다. 이를 파괴하지 않았다? 일제 흔적을 말살하는 데 열심인 대한민국인이 찾아야 할 대답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 속쓰리고 기쁘고 섭섭한 그 모든 사연을 읽기 위해 우리는 여수로 간다.

[여수 여행수첩]

〈볼거리〉 1.진남관: 지난번 경주 지진 여파로 접근 통제돼 있다. 기둥이 앞으로 기울고 지붕도 내려앉아서 보수공사 중이었으나, 지진으로 상태가 악화됐다.  2.고소대: 진남관에서 육교 건너 천사벽화마을 방향. 타루비와 좌수영대첩비(통제이공수군대첩비)가 비각에 있다. 고소대 옆 골목에 대한민국 첫 권투 챔피언인 김기수 체육관이 있다. 문은 닫혀 있다.  3.선소(船所): 전라좌수영의 조선소 겸 선박 수리소. 거북선을 비롯한 전투선을 수리하는 굴강(掘江), 무기고와 병기계 사무실이 복원돼 있다.  4.오충사: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쟁 때 순국한 창원 정씨 4인 위패를 모신 사당.  5.신월리선 터널: 신월로 동성자동차학원 구내에 있다. 사유지이므로 답사는 허락을 받을 것. 반대편 넙너리 마을에도 터널 입구가 있다.  6.일본군 수상비행장: 동성자동차학원에서 해변문화공원 방향으로 1㎞ 정도 가면 바닷가에 보인다. 길가에 주차 공간 없음.  7.여수산단: 도로변에서 촬영은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국가 중요시설이다. '중흥삼거리'를 검색어로 내비게이션을 찾아볼 것.

〈올빼미 야경 투어〉 손석화가 운영하는 여수 필수 야경 투어 버스. 이순신광장에서 출발해 2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 여수산단 야경이 주 아이템. 돌산공원 혹은 묘도휴게소 트럼펫 연주와 막춤 쇼도 재미나다. 1만3000원. (061)665-6697, (010)6652-0662

〈맛집〉 삼합거리: 교동시장 포장마차골목. 낙지, 새우, 삼겹살과 키조개 관자를 매콤하게 요리해 묵은지와 함께 쌈 싸먹는다. 관광객은 '해물삼합'이라고 하고 주민들은 '한판'이라고 부른다. 김치를 좋아한다면 26호집 '깨순이네' 추천. 연등천길 2-4, (010)5300-6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