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이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레드 카펫 위에 유명인들과 패션 관계자들이 오른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의상연구소 기금 마련을 위해 열리는 특별전 '메트로폴리탄 갈라(Metropolitan Gala)'를 축하하는 자리다.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 패션 행사의 지난해 화두는 중국이었다. '중국:유리를 통해 들여다보기'라는 주제에 맞춰 배우와 모델, 디자이너들이 비단에 봉황이나 용을 색색의 자수로 새긴 옷이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왔다. 패셔니스타로 잘 알려진 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는 중국 경극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머리 장식까지 쓰고 왔다. 21세기 뉴욕 한복판에서 17~19세기 청대(淸代)가 재현됐다.
◇색색의 자수로 수놓은 가을·겨울 패션
메트로폴리탄 갈라 전후로 디자이너들은 중국을 연상시키는 옷을 선보였다. 구찌는 올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소매 끝에 풍성한 털이 달린 화려한 문양의 '치파오(旗袍)'를 내놨다. 일명 '차이니즈 드레스'라고 불리는 이 치마는 청나라 때 형성된 중국 전통 의상이다. 펜디는 치파오를 연상시키는 금색 원피스와 재킷을, 에트로는 금색 자수 장식 재킷을 선보였다. 오스카 드 라 렌타, 알렉산더 매퀸,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에서도 중국 도자기 문양이나 비단, 자수, 차이나 칼라를 활용한 의상을 내놨다. 마고 로비, 제시카 차스테인 같은 여배우들은 시상식 등 공식 행사에 중국풍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국내 패션 브랜드에서도 중국풍 자수가 들어간 제품을 빠짐없이 내놨다.
패션계는 한때 명품 소비가 늘어난 중국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붉은 옷이나 용, 봉황 등 동물 문양 액세서리를 내놨었다. 하지만 최근 트렌드는 중국 밖의 소비자를 겨냥하고 있다. 패션칼럼니스트 수지 멘키스는 사라 제시카 파커가 쓴 중국풍 머리 장식을 극찬했지만 이를 중국인이 쓰고 다닐 일은 없기 때문이다.
◇패션계에 부는 중국 바람
패션계에 불고 있는 '중국풍'은 '시누아즈리(chinoiserie)'의 부활로 볼 수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 귀족 사이에 일어난 중국풍 취미다. 유럽과 청나라 사이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면서 당시 중국 문화가 유럽 미술과 가구, 건축, 의상 등 다방면에 영향을 끼쳤다. 한때 '자포니즘'(Japonism·일본 문화, 특히 미술에 영향을 받은 일본풍)이 유행하면서 한풀 꺾였던 시누아즈리가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제2의 시누아즈리' 현상을 가장 잘 드러낸 예는 작년 5월에 개막한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중국 특별전이다. 80만여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역대 최다 관람객을 기록했고 전시가 3주 연장됐다. 중국 문화가 서양 패션에 미친 영향을 조명한 이 전시는 언론과 관객의 극찬을 받았다. 디오르, 랄프 로렌, 랑방, 발렌티노, 샤넬 등 세계적 브랜드들이 중국을 떠올리게 하는 문양, 색깔, 디자인 등의 문화 요소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옷들을 여기에 내놨다. 중국에 대한 환상과 동경까지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