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에 대한 600억원의 자금지원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큰 진통이 있었다. 사외이사들의 반대에 부딪쳐 보름 동안 다섯 차례나 이사회를 열어야 했다. 사외이사들은 확실한 담보 없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것은 배임죄에 해당한다며 번번이 승인을 거부했다.

이와 관련 수출 규모 세계 7위의 무역대국이 고작 600억원에 발목 잡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수십 척의 컨테이너선이 20일 넘게 바다를 떠돌고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초유의 사태다. 지원을 할 수 있느니 없느니 옥신각신 하며 금쪽같은 시간을 날려버린 모습이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배임죄(背任罪) 조항을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현행 배임죄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없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법원 판결이 1·2·3심 모두 다르게 나오기도 할 정도다. 경영판단에 대한 형사처벌이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한진해운 사태가 배임죄 폐지의 논거(論據)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정반대 주장도 가능하다. 한진해운은 논란 많고 문제 많은 배임죄를 개정 또는 폐지하기 힘든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대한항공은 한진해운 때문에 골병이 든 기업이다. 2013년부터 최근까지 한진해운 자금난을 풀어주기 위해 8000억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그로 인해 2012년 말 771%였던 대한항공 부채비율(별도 재무제표 기준)은 지난 6월말 1109%로 뛰어올랐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다 ‘제 코가 석자’가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시 600억원을 빼내 법정관리 기업을 지원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한진해운의 매출채권을 담보로 잡는다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다. 얼마나 회수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다.

여기에는 정부의 노골적인 협박이 있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기업이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배임죄가 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배임죄마저 없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부만 탓할 일은 아니다. 대한항공이 과거 한진해운에 지원한 자금도 배임 소지가 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도록 처리했겠지만 정상적인 자금 운용으로 보기 힘들다. 대한항공 사외이사들은 진작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2013년 조양호 회장이 한진해운을 다시 떠맡기로 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결정이었다. 정부와 채권단의 종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조 회장을 변호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보면 조 회장의 책임이 무겁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진해운은 최은영 전 회장이 독자경영 하고 있을 때도 한진그룹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 2006년 조수호 전 회장의 사망과 함께 계열분리 작업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조 전 회장의 부인 최씨가 경영권을 행사했지만 지분 구조는 애매했다.

조양호 회장과 최은영 전 회장측 지분은 거의 엇비슷했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 지분을 포기하지 않았고, 최 전 회장의 독립 움직임에 협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진해운의 계열 분리는 시기상조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양측의 경영권 분쟁·갈등설이 끊이지 않았다.

조 회장의 당시 속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선친(先親)이 일군 기업이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는 데 대한 우려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 전 회장이 한진해운에서 손을 떼자 조 회장이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굳이 정부가 떠넘길 필요도 없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기업가 정신이나 경영 판단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한진해운 경영권을 다시 행사하기 앞서 세계 해운업 동향을 제대로 살펴보고, 기업 회생 가능성을 따져보기나 했는지 의문이다. 그냥 ‘내 것’을 되찾는다는 정도의 안이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까.

조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대한항공 보통주 지분은 0.01%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경영 관련 핵심 의사결정권은 거의 100% 조 회장이 행사하고 있다. 0.01% 주주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으로 인해 수 만명의 주주와 임직원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기업을 개인의 소유물 취급하는 한국적 재벌 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현행 배임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투자했다가 실패하면 무조건 책임을 묻는 어처구니 없는 일은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대주주의 전횡(專橫)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부여할 수는 없다. 한국식 경영에선 합리적인 경영 판단과 독단의 경계가 애매하다. 그래서 배임죄 개정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는 데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사외이사의 권한을 강화하고, 책임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사회가 대주주를 견제하는 관행이 확립돼야 한다. 결국은 재벌 스스로가 투명경영, 책임경영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배임죄라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