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과 서촌은 한국을 대표하는 한옥 마을이다. 그중에서도 경복궁과 창덕궁·창경궁 사이에 있는 북촌 한옥 마을은 주변의 광화문이나 인사동과 함께 가 봄 직한 서울의 관광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일대는 한국 고유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옥 및 고궁과 더불어 현대식 빌딩과 가게들이 어우러져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서울 종로구 율곡로 83에 있는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여러 건물 가운데 녹색 넝쿨로 뒤덮인 현대식 건물이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잡아끄는데, 이 건물이 바로 한국의 과거와 현재가 집약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다. 과거 건축설계사무소로 사용되던 공간이 현대 예술 박물관으로 거듭난 곳이다. 이 건물은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인 고(故) 김수근 건축가가 세운 건축설계사무소 ‘공간(空間)’의 사옥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건물이기도 하다. 등록문화재 제586호로도 지정됐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을 나와 창경궁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나온다. 담쟁이넝쿨로 둘러싸인 벽면에 검은 벽돌과 기와, 통유리 건물이 한데 어우러져 인근 건물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의 ‘볼재’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전경. 삼성 래미안갤러리와 덕성여대 건물 등이 보인다.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해 1971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1977년에 한 차례 증축을 거쳤다. 대지면적 660㎡에 건축면적 97.4㎡, 지하 1층~지상 5층 규모다. 그가 사용하던 사무실과 집이 있던 자리에 공간의 2대 소장인 장세양 건축가가 통유리 건물을, 3대 소장이자 현재 공간그룹 대표인 이상림 건축가가 한옥을 증축했다. 1~3세대 공간을 통틀어 공간 사옥으로 부른다.

공간사옥이 지어지기 전 이곳은 원래 관상감(觀象監)이 있는 터였다. 조선시대에 천문과 지리, 역수 등에 관한 업무를 맡아본 관아의 터로서 측우기와 물시계, 해시계 등이 이곳에서 발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은 벽돌로 만들어진 구관이 바로 김수근 건축가가 쓰던 옛 설계사무실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그는 이 건물을 지을 때 인근의 고궁 및 한옥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기왓장 느낌의 전돌을 주재료로 삼았고 자연과의 상생을 고려해 담쟁이넝쿨을 심어 외벽을 장식했다.

아라리오뮤지움 인 스페이스의 구관 내부. 고 김수근 건축가가 회의실로 쓰던 장소(위)와 사람의 신장(Human Scale)을 고려해 설계된 계단.

또 내부 공간은 한옥 구조를 도입해 서로 막힘 없이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대지의 경사를 살려 반 층씩 높이는 ‘스킵 플로어(Skip Floor)’ 방식을 도입했고, 사람의 신장(Human Scale)을 기준으로 설계해 크고 작은 방들이 중첩돼 있다. 이 때문에 같은 공간이라도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설계 사무실이자 김수근씨가 거처하던 집으로, 그의 중학교 동창이던 고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도 자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관은 다소 폐쇄적인 구관과 대조를 이룬다. 통유리로 만들어진 신관은 2대 소장인 장세양 건축가가 1997년에 지었다. 구관과는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두고 건립됐다.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대지면적이 208.3㎡에 건축면적은 124.67㎡다.

김수근 건축가의 건축 철학인 ‘공생’을 그대로 계승해 건물의 존재감을 최소화하고 개방성을 강조하는 유리를 전면에 사용했다. 건물 2층에 카페가 있고 3~5층에 각각 이탈리안·일식·프렌치 레스토랑이 있다.

이후 3대 소장인 이상림 건축가가 구관과 신관 사이에 1층 규모의 한옥(건축면적 33.05㎡)을 증·개축했다. 한옥은 구관의 대청마루 역할을 하는 리셉션 홀과도 이어져, 시대를 연결한다는 의미도 담았다. 이 밖에 한옥 카페와 디자인스토어, 소극장도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공간 간판과 석탑, ‘모든 것은 불균형하다’는 의미를 담은 전시 작품들.

공간 사옥은 이후 2014년 8월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새롭게 재탄생했다. 40여년간 건축사무소로 사용되던 건물의 특성을 제대로 보전하면서도 새로운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경영난을 겪던 설계사무소 공간이 2013년 1월 부도로 사옥을 매물로 내놨고, 공개매각을 거쳐 한 차례 유찰됐다가, 현재 ㈜아라리오의 창업자인 김창일 회장이 이를 150억원에 사들였다. 앞서 이상림 건축가의 제의로 공간 사옥에 방문해 특강을 했던 김 회장은 당시 사옥의 유찰 소식을 듣고 공매 최저가인 150억원을 써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곳에는 김 회장이 40여년간 수집해 온 현대 미술작품 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1970년대부터 한국의 근현대 미술품을 수집하던 김 회장은 유럽과 미술, 동남아 등으로 수집 지역을 넓혀 현재 약 3700여점의 현대 미술품을 보유 중이다.

왼쪽 위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고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 코헤이 나와, 키스 해링, 리칭 작가의 작품 모습.

1986년에 창립된 ㈜아라리오는 한국의 전통 민요 ‘아리랑’에서 기업명을 따왔다. 원래 천안에서 버스터미널 사업을 하던 이 회사는 이후 백화점과 갤러리, 영화관 등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서울과 중국 상하이에서 아라리오 갤러리, 제주도에서 아라리오뮤지엄과 탑동 시네마, 신세계백화점 충청점 등을 운영하고 있다.

통유리 건물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면 왼쪽으로 나무에 둘러싸인 창경궁 일대를 볼 수 있다. 정면으로 삼환빌딩과 삼성 래미안 갤러리 등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한옥 지붕 위로 담쟁이넝쿨 건물이 보인다. 전시가 이뤄지는 구관 건물 너머(360도 촬영)에는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 본사가 있다. 멀리 북촌 일대와 덕성여대 건물도 보인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의 7층 규모 ‘볼재’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전경. 창경궁과 창덕궁 일대가 내려다 보인다.

아라리오뮤지엄에서는 ‘텍스트가 조각난 곳(Where Text is Broken by a Building)’이란 제목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내년 2월 26일까지다. 리암 길릭,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등 세계 정상급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세 명의 작가들은 뮤지엄 내 세 곳의 장소에서 ‘공간’에 대한 각자의 예술적 영감을 풀어낸다. 간결하면서도 암시적인 텍스트로 표현되는 개념적 공간(리암 길릭)과 도시의 평범한 일상을 마주하며 만들어지는 시간적 공간(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 그리고 기하학과 유기적인 형태의 관련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풍경의 공간(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이 바로 그곳이다. 입장료는 성인 1만원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매표 마감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매주 월요일 휴관이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의 신관 건물 2층에 있는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