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오후 2시(현지시각), 스위스 취리히의 한 광장에 100개의 로봇들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로봇 탈을 쓴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로봇 머리와 몸통에 '기본소득을 위한 로봇'(robot for basic income) 혹은 '우리는 당신을 위해 일한다'(we work for you)라고 써붙인 채 광장을 돌며 춤을 췄다.

지난 4월 3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며 거리 행진을 벌이는 BIS 관계자들.

이들은 지난 6월 5일(현지시각) 스위스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계획한 단체 BIS(basic income Switzerland)의 관계자들이었다. 이들은 "로봇은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며 로봇으로 사라지는 일자리에 대한 안전판 역할은 기본소득이 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BIS의 체 바그너 대변인은 투표를 홍보하고 기본소득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이 같은 행사를 계획 했다고 밝혔다. 그는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노동자들이 더이상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안 좋은 환경을 견디며 일을 강요 받지 않고, 원하는 일에 종사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6월 5일(현지시각) 스위스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기본소득 도입에 반대한다고 밝히며 국민투표는 부결됐다. 상당수 국내 언론은 "포퓰리즘에 대한 스위스 국민들의 합리적인 거부"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스위스 국민들이 기본소득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단순히 포퓰리즘에 대한 반발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본소득 도입과 관련해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불확실한 상황인데다 기존의 풍족한 복지제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 이민자 급증에 대한 우려 등 복합적인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

◆ 스위스 국민투표 부결 배경은

스위스에서는 국민투표가 대단한 빅 이벤트가 아니다. 1년에 3~4번씩 이뤄진다. 국민투표 요건이 비교적 까다롭지 않아서다. 스위스에서는 법 개정을 원하는 시민 중 누구나 10만명의 국민 서명을 받으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 스위스 국민 800만명 중 2% 정도의 서명만 있으면 국민투표가 가능하다.

6월 5일(현지시각) 실시된 스위스의 '기본소득 도입' 국민투표에서 시민들이 투표하고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투표는 지난 2013년 시민단체인 BIS가 '전 국민에게 조건 없는 기본소득 지급을 위한 법 개정'을 국민투표에 올리는 것에 대해 10만명의 동의 서명을 받아 시작됐다. 연방정부와 의회에서 2년 여간 안건을 검토한 뒤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투표결과 유권자의 77%가 기본소득안에 반대했다. 찬성은 23%에 그쳤다. 투표가 이뤄진 26개 주(州)에서 모두 반대 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예고된 결과였다. 국민투표를 앞두고 스위스 언론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70%가 넘는 유권자가 반대했다.

① 지급액·대상·기간…정해진 게 없었다

국민투표 부결의 배경 중 하나는 기본소득 지급안이 너무 불확실했다는 점이다. BIS는 '전 국민에게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지급액과 기간, 지급대상 그리고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지 등에 대해서는 유권자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외신에서 언급한 '성인에게 월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 18세 이하 미성년자에게 650스위스프랑(약 78만원)'이라는 금액은 BIS가 합리적인 분석을 거쳐 제안한 금액이 아니다. 기본소득이 그 정도는 돼야 스위스에서 기초 생활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홍보에 활용한 것이고 국민투표가 통과됐다면 원점에서 다시 계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② 포기하기엔 너무 잘 되어있는 기존 복지제도

스위스는 복지 천국 이라고 불린다. 현재 스위스에서는 12개월 이상 세금을 꾸준히 내기만 하면 실직 후 2년간 월급의 70~80%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등 실직자를 위한 복지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다. 스위스의 평균 가구소득 중 20% 이상이 사회보장과 관련한 이전수입과 수당이다.

이런 풍족한 복지제도를 포기할 만큼 월 300만원 이라는 기본소득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국민들의 평균 월급은 월 700만원 정도다. 최저임금은 한국의 2배가 넘는 1만4000원이다.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를 먹으려 해도 1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월 300만원'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물가가 세계 최고 수준인 스위스에서 300만원은 큰 돈이 아니다.

게다가 스위스 정부와 국회에서는 기본소득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기존 복지제도를 대거 축소하거나 세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기본소득을 지급하려면 연간 2080억 스위스프랑(약 250조원)이 필요한데 이는 나라 예산의 70%에 달한다. 부가가치세를 8% 정도 인상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③ 이민자 급증 가능성

대다수 서유럽 국가의 고민거리 중 하나인 이민자가 급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기본소득 국민투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 기본소득 찬성론자들은 일정기간 이상 스위스에 거주했다면 이민자에게도 기본소득을 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유럽국가 중에서도 보수적인 성향으로 알려진 스위스는 이민 정책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지난 2014년에는 국민투표에서 정부가 3년 안에 외국인 노동자 상한선을 도입한다는 내용의 '대규모 이민 방지법'이 통과됐다. 유권자의 50.3%가 찬성했다.

이 법안은 이민자가 늘며 스위스 내에서 일자리 경쟁이 심해지고,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가 치솟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스위스 연방이민국에 따르면 2004~2014년 간 연간 약 6만4000명의 유럽연합(EU) 시민들이 스위스에 정착했다.

◆ "기본소득 재논의 필요하다" 공감대

스위스 여론조사기관인 gfs.bern이 국민투표를 앞둔 5월 24일부터 6월 1일 스위스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69%가 "조만간 기본소득에 대한 또 다른 국민투표가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18~29세 중 41%는 "몇 년 안에 기본소득이 도입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체 바그너 BIS 대변인은 "국민투표를 실시한 6월 5일 이후 기본소득에 관한 언론 노출이 급격히 늘었다"면서 "국민투표를 통화 결과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었고 세부사항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졌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