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5일(현지시각) 핀란드 정부는 2000명을 대상으로 조건 없이 매달 560 유로(약 70만원)를 지급한다는 내용의 기본소득 실험 계획을 발표했다. 1만 가구를 대상으로 매달 800 유로(약 100만원)를 지급하는 방식일 것이리라는 당초 예상보다 축소된 규모였지만, 실험의 목표는 더 분명해졌다.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근로 의욕을 높이는지를 집중해서 보겠다는 것이다.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의 플랑팔레 광장에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설치됐다.

앞서 지난 6월 기본소득 도입 여부에 대해 진행된 스위스의 국민투표에서는 기본소득 도입안이 부결된 상황이라 전 세계 이목은 핀란드로 쏠렸다. 반응은 엇갈렸다. 미국 경제미디어 블룸버그는 지난달 31일 실험이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반면 포브스지(誌)에는 지난 5일 “핀란드가 역사적인 실험을 시작했다”면서 “완전한 기본소득 형태는 아니지만 가치 있는 일”이라는 내용의 기고가 실렸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사람은 보통 공돈이 생기면 돈을 벌 필요가 줄며 일을 덜 하면 덜 했지 더 하는 일은 없는 게 아닐까? 그런데 핀란드 정부는 아무 조건 없이 돈을 주면 국민들이 일하고 싶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해답은 너무 잘 갖춰진 핀란드 복지제도의 맹점에 있다.

◆ 근로의욕 저하를 막아보자는 핀란드 기본소득

핀란드가 추진하는 기본소득 실험의 핵심은 돈을 버는 사람에게도 준다는 데 있다. 기존 실업급여는 임시직이라도 일자리를 얻게 되는 경우 지급이 중단됐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취직을 해도 계속 지급된다. 일을 하면 소득이 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실험을 하는 배경은 치솟는 실업률 때문이다.

① 핀란드 사람들, 허드렛일 하느니 논다

작년 말 8%대였던 핀란드의 실업률은 올 초 9.5%까지 높아졌다. 청년실업률은 20%를 넘어선 상황이다. 핀란드 경제는 2012년 1분기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 1위 휴대폰 제조사였던 노키아가 몰락했고, 최대 교역국이던 러시아에 유럽연합(EU)이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병합을 문제삼아 경제제재를 시작해 교역이 줄어든 탓이다.

한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핀란드의 실업률 증가는 일자리 감소 폭보다 컸다.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복지병 때문이다. 경제 사정이 나쁘다 보니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상당수는 저임금 일자리였다. 파트타임이나 임시직으로 실업수당과 별반 차이가 없는 돈을 받으며 일을 하느니 그냥 놀면서 실업 수당을 챙기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② 총선 공약으로 등장하며 기본소득이 대안으로 부상

유하 시필레 핀란드 총리.

핀란드 정부는 국민들의 경제활동 참가 의지를 높일 필요가 있는 상황이 됐다. 이 문제를 기본소득으로 해결하겠다는 아이디어가 정치권에서 나왔다. 작년 5월 치러진 총선에서 중도우파 성향의 중도당(Centre Party)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본소득을 도입하겠다고 공약했다. 취직을 해도 돈을 준다면 허드렛일보다 실업수당을 챙기려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라는 논리에서다.

작년 실시된 국민 여론조사에서 기본소득 1000유로를 지급하는 방안에 찬성한 사람은 69%에 달했다. 국민투표에서 기본소득이 부결된 스위스와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온 셈이다.

총선에서 승리한 유하 시필레(Juha Sipilä) 총리는 사회보험기구 (Kela)를 통해 연구단을 꾸리고 본격적으로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논의에 착수했다. 연구단에는 헬싱키대 등 대학과 정부 경제연구소, 기업인 협회 등이 참여했다.

연구단은 올 초 네 가지 모델을 대상으로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사회보장제도 전부를 대체할만한 금액을 지급하는 완전기본소득, 일부를 대체할 부분기본소득, 세금 체계를 활용해 기본소득 지급의 효과를 내는 방안, 기타방안 등이다. 그리고 이번에 실증실험 계획을 확정해 공개했다.

③ 일할 수 있는 실업자 2000명에게 지급

핀란드 정부는 실업 급여를 받고 있는 사람 중 무작위로 2000명을 선정할 예정이다. 선정된 사람은 2017~2018년에 기존에 받던 실업급여 등과 비슷한 수준인 매달 560유로를 받게 된다. 주택보조금 등 다른 사회보장 제도는 그대로 두고 실업과 최저생계비만 대체하는 부분기본소득 방식을 채택한 셈이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세금도 면제한다.

근로 의욕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한 실험인 만큼 추첨 대상은 현재 실업 급여를 받는 사람 중에서도 실제 일할 나이인 25~58세로 제한된다. 취업과의 관계를 보기 위한 실험인 만큼 노령연금을 받는 사람이나 취업 보다는 학위를 받는 것이 중요한 학생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④ 내년 1월 1일 시작, “법적 의무라 대상자는 거부도 못해”

핀란드 정부는 나중에 비교하기 위해 실험군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대조군도 선정할 예정이다. 이들은 기존대로 실업급여 시스템을 적용 받는다.

핀란드 정부는 2017년 예산이 포함된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이것이 승인되면 내년 1월 1일부터 실험을 시작한다. 기본소득 실험은 법률로 시행되는 일인 만큼 대상자로 선정된 사람은 거부할 수 없다.

2년 동안의 기본소득 지급이 끝나고 나서는 실험군과 대조군의 취업률 등을 바탕으로 실험 결과를 분석하고 시사점을 찾을 예정이다. 기본소득을 받은 쪽에서 의미 있는 취업 증가세가 나타나면 기본소득이 일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 입증되는 셈이다.

◆ 목표는 사회보장 시스템 개혁, 갈길은 아직 멀어…

핀란드 정부는 기본소득 실험이 일하는 사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사회보장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고용을 늘리고 관료주의를 줄이면서 복잡한 사회보장 시스템을 단순화하는 것 등이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됐다.

영국의 과학기술 분야 싱크탱크인 NESTA는 “핀란드의 이번 실험에서 기본소득이 고용 증가 효과에 있다고 나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기본소득은 여러 장기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사회적 약자들이 거대한 기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시민들의 사회 참여를 높이면서 어린이들을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켜 더 나은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 NESTA가 제시하는 기본소득의 효과들이다.

하지만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과 실제 기본소득 제도 도입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 바로 예산 문제다.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많았던 이유도 바로 이를 감당할 재정 문제였다.

핀란드의 성인 인구 490만명에게 매달 560 유로를 준다고 계산하면 매년 약 329억 유로(약 41조원)가 필요하다. 올해 핀란드 정부가 예상하는 세입은 491억 유로다. 재정의 67%를 쏟아부어야 모든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부분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완전 기본소득 제도를 하려면 재정을 넘어서는 규모의 금액이 필요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