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 등을 먼저 긁어주는 게 좋지 않나. 전 국민에 대해 기본소득을 도입하기 보다는 청년과 노인에 대한 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 (김태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아동수당, 노인수당이 기본소득과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부분 기본소득, 단계적 기본소득의 개념에 해당한다. 그리고 어려운 일부 계층을 대상으로 하면 분명히 사각지대가 생긴다."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 8월 31일 국회에서 열린 '불평등한 한국 사회의 새로운 대안, 기본소득을 논한다' 토론회에서는 기본소득을 두고 경제학자, 사회복지학자들이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의 주된 쟁점은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하는가'였다.

지난 8월 31일 국회에서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주최로 열린 기본소득 토론회에는 윤자영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김교성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곽노와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논의는 ‘기본소득이 뭔지’에서부터 막혔다. 기본소득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아동, 노인 등 특정계층을 대상으로 한 ‘부분 기본소득’도 기본소득의 일종이라고 판단했지만, 반대하는 측에서는 기본소득과 다른 별개의 복지 제도로 구분했다. 토론 중간에 이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토론회는 국내 기본소득 논의의 수준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학자들도 잘 모른다. 이제 출발점에 선 수준이다. 유럽은 1980년대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히 펼쳐졌지만 우리나라는 200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소수의 학자들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기본소득과 관련한 책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학술자료검색사이트에 등록된 기본소득에 관한 논문은 80편 정도에 불과하다.

기본 연구가 부족한 탓에 정치권에서도 기본소득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국회 기재위, 복지위, 환노위 소속 의원 중 5.1%만 기본소득을 잘 모른다고 응답했지만 의원 개개인에게 속내를 들어보면 사정은 달랐다. 상당수 의원들이 기본소득과 기존 복지제도의 차이를 헷갈렸고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 한국 기본소득, 전문가가 부족하다

국내에서 기본소득에 대해 알아보려면 주로 해외 서적이나 논문을 참고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본격적으로 학계에서 연구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전문 연구자 수도 많지 않아서다.

외국에서는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의 창설자인 벨기에 루뱅대의 판 파레이스 교수가 기본소득의 지급 액수, 지급 방식, 기존 복지제도와의 관계, 증세를 통한 재원마련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다뤘고 관련 논의가 학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하는가에 논의가 멈춰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경기 부양 효과가 있는지, 근로 의욕과 복지 효율화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남녀 평등에는 어떻게 기여하는지 등 다양한 주제로 논의가 확장되고 있다.

① 복지 보단 성장 추구했던 한국 경제

정부의 복지 지출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이런 상황은 그동안 저부담 저복지를 추구해온 경제 구조와 관련이 깊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지출 비중은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복지지출의 재원이 되는 세금과 사회보험료 비중도 마찬가지로 하위다.

그동안 정부와 국민들이 저부담 저복지를 당연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만 해도 세금을 거둬 복지 지출에 쓰는 대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늘려왔다.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2009년이 되어서야 정치권에서 무상복지를 유행처럼 공약으로 들고 나오면서 복지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존하는 복지 제도 중에서 가장 상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소득이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릴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해외에서는 소득보장제도 등 복지 정책에 대해 연구하는 경제학자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국내에는 드문 이유도 이런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② 경제학자들은 외면하는 기본소득

국내 경제학자 중에서 기본소득을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철학, 사회복지학, 사회학 등 인문학 교수들이 기본소득을 연구하고 있다. 경제학자중에서는 강남훈 한신대 교수가 전 국민에게 한달에 30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에 대해 연구한 정도다.

기본소득이 실제로 도입되려면 경제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재원은 얼마나 필요한 지, 이 재원은 어떤 방식으로 마련할 수 있는 지 등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논의가 앞으로 나가보지도 못한 것이다.

국내 경제학계에서는 기본 소득 이전에 빈곤과 복지 등 경제학의 비(非)주류분야에 대한 연구 자체가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외국에서 복지, 환경, 노동, 개발 등 경제학의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국내 한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는 "경제학계에서 기본소득은 사회복지학의 영역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라면서 "거시, 미시 경제학 이슈가 대화 테이블에 오르는 경제학회에서 기본소득을 얘기하면 이게 뭔 소리인가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③ 부채 강박증 걸린 정부·정치권

내년 기본소득 실험을 앞둔 핀란드는 정부 주도로 기본소득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가 출신의 유하 시필래 총리가 실업수당 등 기존 복지제도가 청년들의 근로 의욕을 꺾는다고 판단해 기본소득을 도입하고 기존 복지제도는 축소 혹은 폐지 하는 방향으로 복지체계를 개편하기로 했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기본소득 실험계획을 세우고 실험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가 부채 증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와 정치권도 기존 복지제도의 개편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막대한 재원이 투입될 것을 우려해 난색을 표하고 있다. 국가 예산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정부 내에서는 빚을 늘리는 것을 금기시 하는 분위기가 일상화 됐다"고 말했다. 이는 새누리당 상당수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 제대로 된 분석 없이 도입했다가는…무상복지보다 큰 파국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기초 연구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입이 추진될 경우 무상급식 사태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기존 복지제도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훨씬 정교한 디자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본소득은 제도 설계에 앞서 충분히 오랜 시간에 걸친 사전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다”면서 “전세계에 실제 도입된 국가가 없기 때문에 참고할 사례도 없어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처럼 기본소득을 얼마나 줄지, 현금과 현물 중 어떤 방식으로 줄지, 기존 복지제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아무런 사회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제도를 도입했다가는 사회적 혼란이 상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 채무 증가는 다음 세대의 세 부담으로 이어진다.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오랜 연구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대선 때 100조원이 넘는 예산이 필요한 무상복지를 공약하면서 ‘증세 없는 복지’를 하겠다고 밝혔다. 재원은 비과세·감면 정비(18조원), 지하경제 양성화(27조원), 세출 절감(84조원) 등으로 하겠다고 밝혔지만 달성율이 미비하다. 증세 없는 복지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제도보다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고 결국 증세가 불가피 하다. 이를 둘러싸고 사회적 혼란이 극심해질 수 있다. 증세를 하지 않고 국채를 발행할 경우 나라 빚이 급증해 다음 세대의 부담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