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업계에서는 신약 하나가 세상에 나오려면 최소 10년의 시간과 1조원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고들 말한다. 다들 약이 비싸다고 하지만 연구개발(R&D)에 들어간 비용과 시간을 따지면 그만큼은 받아야 한다고 본 것. 만약 신약을 지금의 10분의 1 비용으로 개발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약값이 크게 떨어져 환자는 물론, 건강보험에 들어가는 정부의 부담까지 크게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세계 곳곳에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던 의사와 과학자들이 제약 산업의 판도를 뒤흔들 신약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약사들이 수익성이 없다고 외면한 치료제를 개발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로 선진국 시장에서도 통할 치료제를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과연 신약 개발비 1조원의 벽이 무너질 수 있을까.

선진국 항생제 내성 극복에 도전

DNDi 연구진이 아프리카 콩코민주공화국에서 수면병 치료제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연구진은 내전 중에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치료제 개발에 매달린 끝에 제약사가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투자하는 비용의 3%만으로 수면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 열대지방에서는 해마다 1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수면병(睡眠病)으로 사망한다. 체체파리 등의 흡혈파리가 사람 피를 빨아들일 때 편모충이 몸속으로 들어가 감염되는 질환이다. 혼수상태를 유발해 수면병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제 아프리카 사람들이 수면병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것으로 보인다. '펙시니다졸'이라는 수면병 치료제가 개발돼 내년 허가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약을 개발한 곳은 제약사가 아니다. '소외 질병을 위한 치료제 이니셔티브(DNDi·Drugs for Neglected Disease initiative)'라는 국제기구이다. 세계 최대의 의료구호단체인 '국경 없는 의사회'가 199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받은 상금을 내놓아 2003년 설립됐다. 세계보건기구(WHO),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 등 7개 공공 연구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수면병이 아프리카 지역에 주로 발생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낮다고 치료제 개발을 외면했다. DNDi는 이런 '소외된 질병'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기구이다. 지난 10여년간 말라리아, 샤가스병, 리슈만편모충증 등 6가지 소외 질병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했다.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 들어간 비용이 모두 2억9000만달러(한화 3207억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터프츠대 신약개발연구센터는 제약사가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4억달러(1조5484억원)가 들어간다고 밝혔다. 그 비용의 5분의 1만으로 치료제 6개를 개발한 것이다. 저개발국가를 위한 약이어서 정부나 대학, 제약사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공동 개발에 참여한 덕분이다.

최근 국제기구와 보건의료 전문가들 사이에서 DNDi의 모델을 좀 더 폭넓게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DNDi 이사인 하버드대 보건대의 수리 문 연구원은 최근 국제 학술지 '네이처'와 인터뷰에서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배운 교훈을 '소외되지 않은' 질병에도 적용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WHO는 DNDi와 함께 지난 5월 기존 항생제가 듣지 않는 감염병을 치료할 약을 개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항생제 내성균은 주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병원에서 많이 발생한다. 네덜란드 보건부의 연구자문관인 마르자 에스벨드 박사는 "약품 가격 상승은 골칫거리"라며 "DNDi의 모델이 서구 세계에서도 작동할지 주목된다"고 밝혔다. DNDi는 혁신 신약 하나를 1억1000만(1216억원)~1억7000만달러(1880억원) 정도에 개발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제약사가 쓰는 비용의 10분의 1로 신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소외 질병에서 터득한 노하우 활용

DNDi의 자신감은 그동안의 성공 사례에서 비롯됐다. 베르나르 페쿨 DNDi 대표는 2001년 WHO로부터 기존 말라리아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를 위한 치료제를 개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페쿨 대표는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와 접촉했다. 회사가 가진 두 가지 치료제를 합친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 임상시험까지 할 테니 대신 사노피는 특허권을 포기하고 성인 약값도 기존 어린이 약값의 절반인 1달러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사노피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라고 거부했지만 회사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는 기회라는 설득에 승낙했다. 2007년 출시된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에 들어간 비용은 1400만달러(155억원)에 불과했다.

신약 개발 비용이 획기적으로 준 것은 제약업체가 이미 개발한 약물 중에서 효능이 있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DNDi는 경기도 성남의 한국파스퇴르연구소가 자체 개발한 약효 탐색 기술인 '페노믹스크린'을 활용했다. 사람 세포에 특정 약물들을 동시에 투여하면서 약효를 신속하게 확인하는 방법이다. 데이비드 섬 한국파스퇴르연구소 스크리닝팀장은 "빠르게 후보 물질을 확인하고 최적화시켜 연구 범위를 좁혀감으로써 신약 개발 초기 단계의 실패 가능성을 제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두 기관은 리슈만편모충증과 샤가스병 치료제 개발을 같이 했다.

수면병 치료제 역시 같은 방법으로 개발했다. 기존 치료제는 주사제 형태여서 위생 시설이 부족한 아프리카에 맞지 않았다. DNDi는 먹는 약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들은 고속 약효 탐색 과정을 거쳐 2007년 한 제약사가 임상시험 직전에 개발을 중단한 한 약물이 수면병에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를 이번에 먹는 약으로 만들어 허가 절차에 들어갔다. 수면병 치료제 개발에는 4500만달러(498억원)가 들어갔다. 약효를 더 높인 후속 치료제도 승인까지 5000만달러(553억원)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임상시험 비용 줄인 것도 한몫

신약 개발비 절감에는 새로운 방식의 임상시험도 큰 몫을 했다. 제약사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신약이 기존 치료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효과가 좋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대규모 환자 대상 임상시험을 한다. 실제 약효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만 뭔가 나은 점을 찾느라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여러 신약 후보를 계속 끌고 가는 것도 문제다. GSK의 앤드루 위티 CEO도 "신약 개발비 10억달러는 제약산업에서 일종의 신화일 뿐"이라며 "실패 가능성이 큰 후보들만 일찍 탈락시켜도 개발비가 크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DNDi는 소규모 환자들에게서 꼭 필요한 만큼의 약효만 확인했다. 약효가 없으면 바로 개발을 중단했다. 이를 통해 임상시험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었다. 이를 위해 의료진은 내전(內戰) 중인 아프리카 오지들을 찾아다녔다. DNDi 의료담당 이사인 나탈리 스트럽-우개프트 박사는 "내전 중인 아프리카에서 진행한 임상시험은 마치 핀셋으로 코끼리 산모에서 새끼를 꺼내는 것과 같은 과정이었다"고 어려움을 설명했다.

페쿨 DNDi 대표는 선진국에서도 아프리카에서와 같은 전략이 통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국 길리어드사의 C형 간염 치료제가 나오자 다른 제약사들은 치료제 개발을 포기했다. 덕분에 길리어드는 약값을 크게 매길 수 있었다. 하지만 페쿨 대표가 보기에 길리어드 약이 모든 종류의 C형 간염 바이러스에 듣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제약사가 개발하던 약들도 소규모 임상시험을 통해 신속하게 신약으로 발전시키면 더 많은 환자에게 저렴한 약을 공급할 수 있다"고 했다. 말라리아 치료제에서처럼 기존 약들을 결합하는 방법도 쓸 수 있다고 밝혔다. DNDi가 제약산업의 아성에 도전하다 무너지는 돈키호테가 될지, 아니면 신약 R&D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을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소외받는 '소외 질병'을 위한 치료제

―소외 질병: 말라리아·수면병·리슈만편모충증 등 저개발 국가에서 빈발하는 질병으로, 제약사들이 경제성이 없다고 치료제 개발을 회피함
―소외 질병 치료제 개발 건수: 2000~2011년 전 세계에서 승인받은 신약 850종 중 37종(4%)
―소외 질병이 보건 부담에서 차지하는 비율: 11%

DNDi(소외 질병을 위한 치료제 이니셔티브)의 성과

―2007년 승인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비 1400만달러
―2017년 승인 예정 수면병 치료제: 개발비 4500만달러
―향후 혁신 신약 1건당 개발비(추정): 1억1000만~1억7000만달러
―제약사 신약 1건당 평균 개발비: 14억달러

자료: DNDi·네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