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세계 중산층의 몰락
폴 크레이그 로버츠 지음 |남호정 옮김|초록비|308쪽|1만5000원

“글로벌리즘이 전 세계에 걸쳐 전혀 이득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최상의 방법은 글로벌리즘으로 가장 큰 혜택을 입고 있다고 여겨지는 나라가 겪는 곤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는 바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초강대국, 미 합중국이지 않은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하루아침에 집에서 거의 맨몸으로 쫓겨나다시피 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 '라스트 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미국에선 패자들을 구해주지 않아. 여긴 승자들을 위해 세워진 나라니까.”

세계 최대 자본주의 국가이자 세계 최고 부자들이 사는 미국의 상황이 영화 대사처럼 심상치 않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부채 증가로 간신히 버틸 수도 없는 상황까지 도달했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해직당하거나 일자리를 찾지 못해 좌절하고 있고, 설령 직장을 구했더라도 쥐꼬리만한 급여로 부모에게 얹혀사는 신세가 돼 버렸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미 집을 잃었거나,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해 가압류의 처지에 놓여 있으며 전문직 기술자들은 월마트 계산원이 되었거나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을 하는 등 중산층의 소득과 생활수준이 처참히 무너지고 있다.

이는 유럽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채무위기를 시작으로 스페인, 이탈리아, 아일랜드, 포르투갈 같은 '피그스(PIIGS)'에 속한 나라들 또한 국가 부채위기에 처해 있다. 몰려드는 해외 난민에 몸살을 앓고 있는 영국은 최근 브렉시트를 선언하며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안에 휩싸여 있다.

신자유주의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볼 것 같은 제1세계 나라들의 중산층은 왜 몰락했을까? 미국 재무부 차관보를 지낸 경제학자이자 독립언론인으로 활동 중인 저자는 ‘역외이전’이 치명적인 부작용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미국 기업들이 글로벌리즘이라는 기치아래 미국 시장에서 소비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해외에서 생산하면서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해외로 이전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임금이 싼 해외 노동력을 들여와 미국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미국 내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이나 정보통신 같은 전문직 또한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전문직에 취업하는 하는 중산층의 수 역시 더 이상 늘어나지 않게 됐다는 게 로버츠의 분석이다.

그는 또 미국 금융시장의 규제 철폐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된 요인이라고 꼬집었다. 1990년대 후반 언론산업의 집중화와 금융 분야의 주요 규제가 풀리면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이 서로 합병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됐다. 금융시장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카지노 도박장'으로 변해 버렸다.

로버츠는 "금융 규제를 철폐하는 정치가 금융 분야에 전례없는 권력집중화를 허용했다"며 "이제는 금융기업들이 파산시키기에는 너무 큰 존재가 돼 버려 납세자의 보조와 연방준비은행에 의한 부채의 화폐화로 오히려 구제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지금의 미국 경제를 회복시키고, 유럽이 나아가야 할 길은 지금의 실패한 경제학을 버리고 새로운 경제학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길을 제안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불법적인 전쟁을 끝내고 과식 상태에 있는 군 예산을 삭감할 것과, 해외로 빠져나간 생산을 국내(미국, 유럽)로 돌리고 상품을 국내에서 만드는지, 해외에서 만드는지에 따라 세금을 물릴 것, 단기적인 수익률에 따라 지급되는 경영진의 성과급을 없앤다면 미국 경제 회생을 위한 기회의 창은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1부에서는 초부유층이 어떻게 경제학을 이용했고, 시장 자본주의 정당성이 왜 무너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2부는 중산층이 사라지는 미국, 3부는 벼랑끝에 선 유럽의 주권국가들을 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