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승·한국인터넷진흥원 원장

인류 문명은 최대 난제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운 여정(旅程)을 통해 발전해 왔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류의 열망은 지식과 기억 전달 기술의 진화와 궤를 같이한다. 특정한 시기에 언어로만 전달되던 지식은 동굴 벽화(壁畵)와 파피루스에 이어, 종이라는 혁신적 전달 수단이 개발되면서 다중(多衆)의 학습과 소통이 가능해졌다. 또 바퀴의 발명으로 인간은 거리와 무게, 속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됐다. 종이와 바퀴는 문명의 융합과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인류 문명의 발전을 선도해온 종이와 바퀴라는 두 축(軸)은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에 따라 근본적인 변혁을 맞고 있다. 종이는 20세기 초 에디슨이 발명한 전신(電信)으로 그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화비평가 마셜 매클루언은 "전신이 등장하고 나서야 정보는 돌이나 파피루스와 같은 견고한 사물들로부터 분리됐다"고 말했다.

1980년대 범용 컴퓨터와 함께 저장파일이 등장했고 최근에는 클라우드 컴퓨팅이 새로운 지식 전달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ICT 발달로 '보이는 물질'과 이별을 시작한 정보는 이제 실시간 생산·이동·저장·가공되며 '언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유비쿼터스(Ubiquitous)의 상징이 됐다.

인류 문명의 또 다른 축인 바퀴 역시 근본적 변혁을 맞고 있다. 미국 전기자동차 업체 '테슬라'사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고안한 초음속열차 '하이퍼루프(Hyperloop)'에 대한 시험이 올해 말에 이뤄질 것으로 알려졌다. 시속 1300㎞를 달리며 1.1초 만에 187㎞까지 가속되는 이 열차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최근 각광받는 드론(drone·무인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누구보다 먼저 이런 ICT의 잠재성에 주목했다. 과감한 도전과 투자, 창업가 정신이 조화를 이루며 세계 수준의 ICT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인류의 큰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온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구시대적 시스템과 기존 패러다임에 젖어 혁신이 멈춘 것이 아닌지 냉철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때 ICT 인프라 강국이었다'는 자긍(自矜)심을 내려놓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때다.

ICT 기반 미래 혁신은 시스템의 고도화뿐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인드 셋(mind set·사고방식)'마저 변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협업을 통한 확장을 외면하는 조직이기주의, 미래 신산업에 도전하지 않는 안이한 기업가 정신, 시장과 현장을 벗어난 관료주의 등이 ICT 시대의 족쇄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과거의 악습과 부질없는 영화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이버 공간을 종횡무진 내달리는 글로벌 혁신 기업들은 데이터·콘텐츠·플랫폼 등 미래의 온갖 자산들을 선점하면서 따라잡을 수 없는 간극을 벌리고 있다. 시공을 초월하는 새로운 ICT 문명 창조의 기회가 목전에 있다. 머뭇거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