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 질량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을 입증하는 ‘신의 입자’ 힉스의 존재가 입증된 2012년 이후 전 세계 물리학자들이 이른바 ‘포스트 힉스’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힉스 입자의 존재가 입증돼 현대 물리학의 근간인 ‘표준모형’이 완성됐지만, 모든 물리학 현상을 표준모형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암흑물질이나 중성미자, 초대칭 입자 등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힉스 입자의 존재를 입증해 201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힉스 입자를 검출한 거대강입자가속기(LHC)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해 새로운 입자를 찾아 나섰다.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에 설치된 LHC는 양성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한 뒤 서로 충돌시켜 아주 미세한 입자의 신호를 확인하는 검출 장비다.

힉스 입자 입증 이후 새로운 입자를 찾아 나서려는 물리학의 다음 단계는 아직 불투명하다. 새 입자로 기대를 모았던 CERN 장비의 특이 신호는 단순 오류로 판명 났고 일본은 새 입자 연구에 필요한 엄청난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과학계는 당분간 CERN이 이 연구를 주도할 것으로 보고 있다.

힉스 입자가 아닌 새로운 입자일 것으로 기대됐지만 ‘잡음’으로 판명된 750기가전자볼트라는 높은 에너지 영역에서 검출된 신호.

◆ 업그레이드된 LHC, 새로운 입자는 없었다

현대 물리학의 근간인 ‘표준모형’은 우주가 물질을 구성하는 6쌍의 입자와 힘을 전달하는 4개 입자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이 기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으로 설명된 힉스 입자까지 포함해 17개의 입자로 이뤄져 있다는 이론이다. 지난 2012년 힉스 입자의 존재가 입증되며 표준 모형은 완성됐다.

힉스 입증에 혁혁한 공을 세운 LHC는 지난해 충돌 양성자의 에너지를 1.5배가량 높이는 등 장비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그 결과 작년 6월 약 13테라전자볼트(TeV)의 에너지로 양성자를 충돌시키자 질량이 무거운 새로운 입자일 가능성이 있는 신호가 검출됐다. 질량이 750기가전자볼트(GeV)인 신호를 포착한 것이다. 양성자를 8TeV로 가속시켜 충돌시켰을 때 125GeV 영역에서 검출된 힉스 입자와는 다른 신호였다.

과학자들은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미지의 입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고 수개월 동안 이 신호를 분석한 논문이 500편 넘게 발표됐다. 서울대, 한양대 등 국내 대학 연구진도 분석에 참여했다. 이 입자가 어떤 입자인지 확인되면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역사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CERN은 지난 8월 초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국제고에너지물리학콘퍼런스(ICHEP)’에서 CERN은 새로운 입자가 아니라 단순 오류였다는 결론을 공식 발표했다. 8월 초 열린 ICHEP에서 작년에 검출된 신호가 새로운 입자일 가능성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신호가 검출된 당시 힉스보다 좀 더 무거운 고에너지 힉스이거나 초대칭 입자일 가능성 등이 거론됐지만, 오류인 것으로 판명 났다. 초대칭 입자는 여러 개의 입자가 있을 때 2개의 입자를 바꿔도 똑같은 상태를 유지한다는 초대칭 이론을 설명하는 입자다. 전 세계 물리학자의 실망감도 컸다.

CERN은 “추가 실험을 통해 훨씬 더 많은 데이터가 쌓이게 되면 새로운 입자를 검출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며 “새로운 입자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CERN은 스위스 제네바 시내를 둘러싸는 터널을 뚫어 100TeV의 고에너지 영역으로 양성자를 가속시켜 충돌하는 실험장치인 ‘FCC(Future Circular Collider)’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있다. 현재 지하 100m에 둘레가 27km인 LHC의 규모를 크게 뛰어넘는 대규모 실험 장치 구축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성능을 업그레이드한 LHC에서도 새로운 입자가 발견되지 못한다면 기존보다 훨씬 높은 고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새로운 입자 연구 당분간은 LHC가 주도...일본 ILC, 미국 Dune 프로젝트도 관심

일본 과학자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31km 길이의 국제선형충돌가속장치(ILC)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8월 초 CERN이 작년에 새롭게 검출한 신호가 별것 아닌 것으로 발표하자 자연스럽게 일본을 중심으로 논의 중인 ILC 프로젝트에도 눈길이 모이고 있다. 일본 ILC가 CERN의 LHC가 완성한 현대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뛰어넘는 새로운 입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일본의 중성미자 검출기.

일본은 전자와 양성자를 일자로 된 31km 길이의 터널에서 충돌시킬 수 있는 ILC 프로젝트를 10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일본의 ILC 구축을 위해서는 예산을 조달하기 위해 다른 나라도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국제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일본 문부과학성과 미국 등이 ILC 구축에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일본 내에서는 ILC 프로젝트가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지 못하고 있다. ILC 프로젝트는 약 100억달러(약 11조원)의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태정 한양대 교수는 “향후 20년간의 입자 물리학 실험은 CERN의 LHC 중심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우주의 약 27%를 채우고 있지만, 존재를 규명하지 못한 암흑물질 등 표준모형이 설명하지 못하는 물리학 이론들을 탐색하는 게 앞으로 물리학자들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미국 물리학자들은 힉스 입자나 초대칭 입자보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위한 ‘Dune’ 실험을 계획 중이다. 흔히 유령 입자로 불리는 중성미자는 우주의 물질을 이루는 기본입자이지만 다른 입자와 거의 반응을 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김태정 교수는 “미국에서는 일리노이주 페르미연구소에서 미국 중부 사우스다코다에 이르는 곳에서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위한 ‘Dune’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있다”며 “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