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명동 일대는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의 이른바 ‘핫 플레이스’이자 강남, 홍대, 여의도 등과 함께 내국인들도 자주 찾는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 중 한 곳이다. 명동 주변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옥부터 대형 백화점, 호텔 등 높은 건물들이 모여 빌딩 숲을 이루고 있다.

명동은 ‘쇼핑의 거리’로 불릴 만큼 관광객들 사이에선 쇼핑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화장품·의류·신발 가게와 다양한 음식점 등이 길 양옆에 빼곡히 들어서 있고,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고층 빌딩 숲과 수많은 인파로 분주한 거리 사이에는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건물이 시야에 펼쳐진다.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자 총 본산인 명동성당이다.

명동성당 전경.

◆ 100여년 근현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건축물

대한민국 최초의 고딕 양식 성당이자 최초의 벽돌 건축 교회인 명동성당(내부 360도 사진)은 1989년 5월 29일 지어졌다. 고딕 양식이란 우뚝 솟은 첨탑이 특징으로, 12~15세기 무렵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다. 명동성당은 1688㎡의 부지에 길이 68m, 너비 29m, 높이 23m(종탑 높이 46.7m) 규모로 지어졌다. 설계는 프랑스 국적의 유진 코스트 신부가 맡았다.

명동성당(왼쪽)과 중림동 약현성당(오른쪽). 높은 첨탑 등의 생김새가 형제처럼 닮았다.

코스트 신부는 명동성당을 짓기 전 중림동에 시험작으로 약현성당을 먼저 건축했다. 그래서인지 약현성당은 명동성당의 축소판이면서 건축학적으로 서로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명동성당의 준공 당시 명칭은 대지 이름을 딴 종현(鍾峴)성당이었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명동성당(외부 360도 사진)의 경내에는 성당을 중심으로 가톨릭회관(옛 성모병원)과 사도회관(옛 주교관), 사제관, 수녀원, 문화관, 교육관 등이 들어서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청에 따르면 사도회관은 명동성당이 지어지기 1년 전인 1891년 준공됐다. 가톨릭회관은 1961년, 사제관과 수녀원 등은 1979년에 지어졌다. 이 건물들은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이용한 프랑스 고딕양식으로 지어져 기존 건물과 위화감이 거의 없다.

명동성당은 100여년의 세월을 견뎌내는 동안 수차례 보수공사를 거쳤다. 1944년과 1983년의 보존 보수공사에 이어 2002년부터 2009년까지는 100억원 이상을 투입해 성당 외벽을 둘러싼 벽돌을 교체했다. 약 70만장의 벽돌 중 심하게 부식된 30만~40만장의 벽돌을 하나씩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명동성당 관계자는 “현재 성당의 벽을 이루고 있는 벽돌은 1장당 1만원의 헌금 형태로 마련됐다”며 “빼낸 벽돌들은 역사적인 가치와 명동성당의 상징성을 고려해 신자들에게 나눠 주거나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2011년에는 2029년까지 명동성당과 계성여고, 가톨릭회관 등의 부지를 아울러 개발하는 ‘명동성당 특별구역 세부개발계획(이하 명동성당 개발계획)’이 수립됐다. 총 4단계에 걸쳐 개발될 예정으로 지금은 1단계 개발이 끝난 상태다.

1단계 개발로 교구청 증축을 맡은 대우건설(047040)은 지난 2011년 착공에 들어가 2014년 준공했다. 대우건설은 교구청을 대지면적 1만1866㎡, 연면적 3만2756㎡, 지하 4층~지상 10층 규모로 증축했다.

지상에 있던 주차장이 지하로 내려가고 명동성당 진입부에는 ‘1898 광장’을 조성하면서 교구청 신관과 파밀리에 채플도 마련했다. 1898 광장은 명동성당이 설립된 1898년을 기념해 지어졌으며, 광장에는 기념품점과 갤러리, 서점, 카페 등이 있다.

명동성당 옆에 있던 계성여고는 개발계획에 따라 성북구 길음동으로 이전했다. 옛 계성여고 부지는 지금 공사 중이다.

2단계 개발계획은 명동성당 옆에서 성북구 길음동으로 이전한 계성여고 부지의 소유권 정리와 길음동 부지 대금 문제, 서울시의 개발계획 승인 절차 등이 끝나야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1970~1980년대 인권·민주화 성지에서 결혼·관광 명소로

명동성당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도 빠질 수 없는 장소로, 특히 지난 1970~1980년대에는 인권·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명동성당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였다.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전두환 전(前) 대통령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 반발해 ‘6·10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 진압으로 내몰린 시위대가 성당으로 모여들면서 성당은 경찰과 시위대의 대치 현장이 됐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차장이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려 했지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라”며 이를 제지하면서 6월 민주항쟁이 계속될 수 있었다.

이밖에 1975년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세웅, 김승훈 신부 등이 발표한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1978년 ‘동일방직 사건’, 1979년의 ‘오원춘 납치 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 시위 현장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최근에는 정·재계뿐 아니라 연예인들의 결혼식 장소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올해 4월에는 정몽구 현대자동차회장의 장녀인 정성이 이노션 고문의 아들 선동욱 씨와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의 딸 채수연 씨가 명동성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회장의 차남 박재원 씨는 지난 2014년에, 손학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차녀 손원평 씨는 지난 2011년에 명동성당에서 화촉을 밝혔다. 배우 박희본과 김강우, 아나운서 김나진, 황정민 등도 명동성당에서 결혼했다.

지난 4월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정성이 이노션 고문의 차남 선동욱 씨의 결혼식에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노현정 전 아나운서가 참석했다.

명동성당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겐 관광명소로도 꼽힌다. 성당을 둘러보다 보면 가이드를 따라 무리지어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을 정도다. 서울시 유동인구 통계에 따르면 명동성당 일대를 찾는 사람은 한 달에 약 150만명 정도다.

명동성당 주변에는 외국인들이 주로 묵는 게스트하우스나 비즈니스 호텔 등도 몰려있어 성당을 쉽게 오갈 수 있고, 외국인들이 즐겨 보는 한국 관광 안내 책에는 명동성당이 관광 명소로 소개되어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을 찾은 리우밍쉬엔(刘明萱·33) 씨는 “중국에서 산 한국 여행 가이드북에 명동성당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고, 숙박시설 주변이라 오기 편했다”며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건물도 예뻐 중국 관광객들 사이에선 반드시 가봐야 할 한국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