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와 요리를 넘나드는 바텐딩의 세계
최고의 바텐딩 위해 물고나무 서고 요가 수행 하는 바텐더
폼생폼사? NO! 연기 연습 하듯, 고시 공부하듯 수련한다

런던 사보이 호텔의 ‘아메리칸 바’에서 50년 간 바텐더로 일해 온 피터 도렐리는 바텐더를 두고 ‘기술, 지식, 창의력, 친화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바텐더는 셰프나 소믈리에와 마찬가지로 여러 역할을 두루 아우르고 있어 그 실력을 육상경기처럼 초시계로 재듯 평가하기가 힘들다. 많은 바텐더를 만나고, 더 다양한 바텐더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름의 기준으로 ‘좋은 바텐더’의 형상을 그려나가는 중이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선명해지는 한 가지가 있다. 바텐더는 절대 ‘폼생폼사’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

도꾜, 런던에서 만난 백발 희끗한 인생 고수 바텐더들

물론 처음엔 화려한 바 뒤, 잘 차려입은 바텐더들을 보고선 “모델인가?” 싶은 적도 있다. 군더더기 없는 손짓과 명료한 말투, 훤칠한 키에 꽉 들어찬 칵테일 지식까지.... 물론 국내 바 산업이 최근에 급성장한 탓에 바텐더들의 연령대가 낮은 건 사실이다.

백발이 희끗희끗한 일본의 바텐더나 손주가 족히 셋을 있을 법한 런던의 바텐더들과는 달리 외양부터 말끔하고 근사하다. 하지만 바텐더들의 겉모습에만 정신을 팔순 없다. 안팎으로 갈고 닦는 그들의 수련이 엄청나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렇다.

런던 사보이 호텔의 ‘아메리칸 바’에서 50년 간 바텐더로 일해 온 피터 도렐리는 바텐더를 두고 ‘기술, 지식, 창의력, 친화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바텐더는 친화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셰프보다 뛰어나고, 칵테일을 만들어내는 창의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소믈리에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평한다.

충만한 자부심에서 나온 말이라 셰프나 소믈리에가 들으면 발끈하겠지만, 피터 도렐리의 설명엔 좋은 바텐더가 갖춰야 할 필수 요소가 다 들어가 있다.

바텐더 50년에 요가 수행 47년… 체력, 성격, 습관까지 훈련한다

유럽이나 미국의 바텐더는 ‘친화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손님 앞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표출하고 제대로 전달하는 법을 고민한다. ADHD 환자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늘 쾌활해 보이는 법, 그 와중에 칵테일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기술을 연마한다. 당연히 상당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하다.

작년, 1940년생의 피터 도렐리와 약 2시간가량 인터뷰할 때 체력이 먼저 떨어진 건 내 쪽이었다. “바텐더 생활 50년에 요가 수련을 도합 47년 했습니다. 온종일 근무하고 집에 가면 물구나무를 섰어요. 이렇게 매일 나를 다지지 않으면 좋은 바텐더가 될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열리는 공신력 있는 바텐더 대회 중 하나인 ‘디아지오 월드 클래스 2015’ 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해 파란을 일으킨 바텐더 가네코 미치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칵테일과 손님을 대하는 전 세계 바텐더의 마음 만큼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일본인 바텐더 가네코 미치토가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열리는 공신력 있는 바텐더 대회 중 하나인 '디아지오 월드 클래스 2015' 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해 파란을 일으킨 바텐더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10대 시절을 지나 우연히 바에서 마신 모스코뮬(보드카와 진저비어가 들어간 칵테일) 한잔에 매료되어 바텐더의 길로 들어선 그는 대회를 준비할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매일 최소 6시간에서 12시간 정도 칵테일 만드는 걸 훈련했습니다. 특히 ‘실수하는 연습’을 했어요.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입니다. 연습을 반복할수록, 특정 행동의 횟수를 늘려갈수록, 그다음 행동으로 의식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일본인의 감각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야구 선수 이치로가 배트로 야구공을 치는 순간 이미 세 걸음 나가 있다고 하는 것처럼, 훈련은 모든 행동이 연이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마치 무림의 고수 같은 가네코 미치토의 말은 일본 바텐더 특유의 섬세함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의 바텐더들도 그에 못지 않게 훈련에 열심이다. 청담동에 있는 바 '믹솔로지'의 김준희 바텐더는 평소의 습관부터 통제한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된소리가 많이 나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는 습관이 손님 앞에서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한마디라도 더 부드럽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칵테일을 만들 때 그의 행동과 손짓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움직임을 최소화한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팔꿈치가 벌어지는 반경도 좁고, 다리의 움직임도 거의 없다. 손님이 바텐더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자세가 너절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쓴다. 손님의 시선이 저절로 칵테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다.

향수를 조향하듯 요리를 만들 듯, 칵테일을 만든다

그렇다고 바텐딩이 기예나 무술, 혹은 무대 퍼포먼스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생소하지만 조화로운 맛을 만들고, 듣도 보도 못한 모양의 칵테일로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일은 상당한 ‘공부’를 필요로 한다.

청담동에 있는 바 믹솔로지.

런던의 바 ‘아르테시안’을 4년 연속 세계 1위의 자리에 올려놓은 시모네 카포랄레와 알렉스 크라테나는 전 세계를 돌며 신기한 식재료를 발굴하고, 향수를 만들듯이 완전히 새로운 맛과 향을 조합해낸다. 노르웨이와 런던을 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바텐더 모니카 버그는 자신의 칵테일이 요리인지 음료인지 헷갈리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칵테일 창작의 범위가 요리까지 닿는다는 뜻이다.

국내에도 내로라하는 바텐더들은 칵테일과 관련된 원서를 읽으며 주독야경(바텐더의 근무 시간을 고려하면 주경야독이 아니라 주독야경)하고 작은 노트에 칵테일 그림이며 레시피를 빼곡히 정리해둔다. 청담동 ‘르 챔버’의 박성민 바텐더나 청담동 ‘키퍼스’의 손석호 바텐더도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는 양으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바텐더들이다.

오늘도 바텐더들은 밤 예닐곱 시가 되면 말끔하게 차려입고 바 탑으로 향한다. 온종일, 한 달 내내, 그리고 어쩌면 수년간 갈고 닦은 기술을 칵테일 한잔에 녹여내기 위해서. 오늘 밤 내가 즐기는 이 칵테일 한잔의 여유가 누군가의 정진과 훈련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해보자.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바텐더에게 “나이가 몇 살인지”, ”이 술 왜 이렇게 비싼가”라는 질문 대신 그들의 노력에 대해 한번 물어보자.

◆ 손기은은 남성 라이프스타일 월간지 ‘GQ KOREA’에서 음식과 술을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로 9년 째 일하고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레스토랑의 셰프부터 재야의 술꾼과 재래시장의 할머니까지 모두 취재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요즘은 제대로 만든 칵테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바와 바를 넘나드는 중이다. 바람이 불면 술을 마신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