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근(75) 부영그룹 회장은 검소한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공항을 가도 요란스러운 식사 대신 빵 같은 간단한 음식을 사 먹는 것을 선호하고, 평소 점심으로는 6000~7000원 정도의 도시락과 김밥을 즐겨 먹는다. 골프는 아예 치지 않고 술도 안 한다. 아침마다 부인 나길순 여사와 산책을 할 정도로 소박한 생활을 즐긴다.

이런 그가 최근 삼성그룹 부동산을 사들이는 데 쓴 자금만 1조원에 이른다. 그것도 단 8개월 만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부터 따져보면 인천 송도 옛 대우자동차판매 부지, 강원 태백 오투리조트, 경기 안성 마에스트로CC 등을 차례로 사들이며 약 5000억원을 썼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어떻게든 현금성 자산을 팔아 유동성을 마련하려는 기업이 대부분인데, 이 회장은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명당에 관심…부영그룹 도약 의지”

23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부영은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다음 달 초 사옥 매매 관련 양해각서가 체결될 예정이며, 늦어도 다음달 말이면 본계약을 체결할 것으로 전해졌다. 매각 가격은 4500억원대로 알려졌다.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은 연면적이 5만4653㎡에 이르며, 지하 6층~지상 21층으로 1987년 준공됐다.

부영그룹은 올해 초에도 중구 세종대로(옛 태평로)에 있는 삼성생명 본관을 5750억원에 사들였다. 삼성전자 서초사옥이 조성되기 전 삼성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었다.

이중근 회장은 “부영빌딩은 서울 도심에 있는 세종대로 뒷길에 있지만, 삼성생명 본관 건물은 큰길에 있다”며 “우리도 한번 앞으로 나가보자는 생각에 (삼성생명 본관을) 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풍수지리에도 상당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부영그룹 사옥은 원래 동아건설이 있던 자리인데, 부영이 2003년 이 건물을 사들이고 나서 풍수지리학적으로 더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건물 방향을 인위적으로 바꾸기도 했다. 건물 남쪽 벽면을 허물고, 서쪽 출입문을 막아 원래 서쪽이던 건물을 남향으로 바꾼 것이다.

일각에서는 부영이 삼성생명 본관을 사들인 것을 두고 새로운 도약 의지를 보인 것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이른바 ‘명당’을 사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본다. 실제로 삼성생명 본관은 손꼽히는 명당으로 잘 알려졌다. 1880~1890년대에 근대식 백동전을 만들던 조폐기관 전환국이 있었던 자리라 돈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 “임대주택사업 노하우로 될만한 부동산만 사”

이중근 회장은 땅 잘 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십년간 임대주택사업을 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다. 임대주택의 경우 일반분양 아파트와 달리 5년 또는 10년의 의무 임대기간 이후에 분양전환이 되기 때문에 그 지역의 부동산 가치 상승이 향후 분양가에 반영된다. 건설사는 당연히 향후 가치가 좋아질 만한 곳에 임대주택을 지어야 분양전환 때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렇게 부영이 임대주택으로만 번 돈이 2조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회장은 가격과 타이밍을 철저하게 계산하며 부동산 매입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삼성생명 본관 인수 때도 이 회장은 오랫동안 이 건물을 지켜보며 매입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고 이 회장이 말하기도 했다.

2012년 사들인 소공동 호텔 부지도 마찬가지. 부영은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맞은편 부지 5327.12㎡를 중견 건설업체 삼환으로부터 1721억원에 사들였는데, 당시에도 업계는 이 부지가 3.3㎡당 1억원 안팎의 가치가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업계 관계자는 부영이 이 땅을 개발해 호텔을 세우면 당시 사들였던 가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가치가 생길 것이라고 본다.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

저평가된 땅이라면 망설임 없이 사들이고, 사야 할 때라고 생각하면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지르는 승부사 기질을 가진 것인데, 이번에 사들이는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도 상당한 알짜 매물로 꼽힌다.

부영은 삼성화재 사옥을 임대용으로 쓸 것으로 전해졌는데, 부동산업계 관계자들은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과 가깝고, 주변 오피스 수요가 많은 만큼 꽤 괜찮은 수익률이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앞으로 이 건물을 되판다 하더라도 상당한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재계는 부영이 현금이 풍부한 만큼 이 회장이 앞으로 나오는 알짜배기 부동산 매물도 눈여겨볼 것으로 보고 있다. 부영이 부동산시장의 큰 손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부영 관계자는 “시장에 나오는 부동산 매물의 경우 사업성을 꾸준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업계를 넘어 재계 전체가 부영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1941년생인 이중근 회장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1976년 우진건설이라는 회사를 세웠지만, 7년 만에 부도를 냈다. 1983년 부영주택을 설립해 다시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현재는 총 자산규모 20조4000억원, 재계 13위(민간기업 기준)의 기업을 일궜다. 자수성가한 총수의 대표 모델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