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설립된 한글과컴퓨터는 1997년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급격한 어려움에 처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는 경영위기에 빠진 한글과컴퓨터에 2000만달러 자금지원을 제안했다. 한글과컴퓨터는 1998년 6월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아래아 한글'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약속했다.

당시 MS는 일본에서 20만원이 넘게 팔리는 자사 워드프로세서를 한국에서는 거의 공짜로 제공했다. 아래아 한글이 없어지면 MS는 신규 구입 비용과 워드 사용법 재교육 비용 등 1조원 가량의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000만달러를 들여도 강력한 경쟁자를 배제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전하진 전(前) 국회의원이 5월 30일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 앞 카페에서 IT조선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래아 한글을 포기한다는 ‘한컴 사태’는 국민들 사이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키며 1998년 6월 22일 '한글지키기운동본부'가 결성됐다. 당시 이민화 벤처기업회장의 주도로 한글학회 등 15개 단체가 참여, 한글과컴퓨터 살리기에 동참했다. 미국 MS가 시장을 잠식해 나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글과컴퓨터는 7월 20일 운동본부와 1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받는 대신 MS와의 계약을 파기하는데 합의했다. 이후 이민화 회장과 이찬진 사장 등은 한글과컴퓨터를 재건할 새 사령탑을 찾아 나섰다. 역사속으로 사라질뻔 했던 한글과컴퓨터를 재건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전하진씨가 대중 앞에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다.

◆ '한국 벤처史' 정면에 등장한 전하진

1998년 7월 23일 당시 전하진 지오이월드 사장은 속초 대포항에서 이민화 회장과 소주를 한잔 기울이게 된다. 이 자리에서 전 대표는 이 회장에게 '한글과컴퓨터' 신임사장 응모를 제안 받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전 사장은 한글과컴퓨터 신임 사장에 응모했다. "한글과컴퓨터 마저 쓰러지면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미래는 없다"는 이민화 회장의 한 마디가 전 사장의 마음을 뒤흔든 것.

당시 전하진 사장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을 하다 강연을 위해 잠시 한국을 찾은 상황이었다. 1984년 인하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전하진은 금성사(현 LG전자) 컴퓨터사업부에서 근무하다 1988년 픽셀시스템을 창업했다. 이후 1994년에는 레가시를 설립하고, 1997년 1월에는 자본금 2억5000만원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소프트웨어개발 유통회사인 지오이월드를 세웠다. 또 한국벤처기업협회 실리콘밸리 지회장도 역임했다.

그는 '브리핑 시스템'이라는 한국 최초의 파워포인트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온라인 키오스크를 만들어 고속도로에 설치했다. 증권단말기도 개발해 전국에 100만개를 보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등 초기 기술벤처의 상징이었다. 이민화 회장의 눈에는 이미 전하진 사장이 한글과컴퓨터를 살려낼 역량이 충분했다고 비춰졌던 것.

한글과컴퓨터 신임 사장에 응모한 인원은 약 30명 정도로, 최종 면접에는 총 3명이 올랐다. 1998년 7월 26일 이민화 회장, 이찬진 사장 등은 이들 3명과 함께 '한글과컴퓨터를 어떻게 살릴 것인지'에 대한 주제로 토론을 시작했고, 결국 1명은 "제 자리가 아닌거 같습니다"라는 외마디를 남긴채 자리를 떠났다. 결국 면접에는 전하진 사장과 이유재 보사저널 엠 발행인 등 2명만이 남게 됐다.

이들의 마지막 미션은 프레젠테이션(PT). 우열을 가리지 못한 상황에서 이유재 발행인은 전하진 사장에게 양보를 했고, 본인은 사외이사 자리를 맡게 됐다. 한글과컴퓨터는 이찬진 기술개발 담당 사장과 함께 전하진 마케팅 담당 사장이 공동으로 경영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1998년 7월 28일 당시 전하진 한글과컴퓨터 신임 대표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1998년 7월 2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글과컴퓨터 본사에 모인 이찬진 사장과 이민화 벤기업협회장(한글 지키기 운동본부장) 등은 한글과컴퓨터의 새로운 사장에 전하진 지오이월드 사장을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카메라 플레시가 터지는 가운데, 한 일간지 기자는 전 신임 사장에서 "얼마를 받고 한글과컴퓨터 대표이사로 일하게 된 것이냐"고 물었고, 이민화 회장은 "이찬진 사장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이찬진 사장의 당시 연봉은 4000만원.

그때서야 전 사장은 자신의 연봉이 4000만원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얻는 수익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물가가 비싼 미국에서 자녀들의 학비까지 모두 책임져야 하는 전 사장 입장에서는 막막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전 사장의 마음속에는 이미 먹고 사는 걱정보다 ‘재건’에 대한 의지가 더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전하진은 위기에 빠진 한글과컴퓨터를 구할 '구원투수'로, 한글 벤처사(史)에 본격 모습을 드러냈다.

◆ '구원투수'에서 '패전투수'의 길을 걷게 된 전하진

한글과컴퓨터 구원투수로 나선 전하진 사장은 남아 있는 개발자 몇명과 재건에 들어갔다. 워드 프로세서 하나만 팔아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한 전 사장은 외국 투자를 받기 위해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국내서는 투자 받을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래아 한글 유저를 인터넷 유저로 만들겠다고 했던 전략은 주효했다. 하지만 한글이 포함된 오피스 소프트웨어 하나만으로는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고, 하늘사랑·네띠앙 등 20여개 벤처에 투자를 하게된다. 지금은 일반화된 하나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로 수십 개의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는 싱글사인온(Single Sign-On) 서비스도 진행했다.

그 와중 십만원이 넘는 아래한글을 1만원 파격적인 가격에 내놓게 된 '한글 815 특별판'은 100만개 판매를 목표로 삼았지만, 70만개 판매에 그치는 등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1998년 당시 전하진 한글과컴퓨터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미 언론에서는 '한글과컴퓨터가 부활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아직 갈길이 먼 회사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전 사장은 자칫 희대의 사기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인터넷 사업 강화를 위한 투자 유치에도 빨간불이 켜지면서 전하진 대표는 결국 2001년 한글과컴퓨터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네띠앙 대표로 새로운 레이스를 시작했다.

네띠앙에서 새로운 둥지를 튼 전 사장은 70만명에 달하는 아래아 한글소프트회원과 80만명의 회원을 가진 인터넷포털사이트 네띠앙의 회원을 발판으로 종합인터넷솔루션 업체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같은 계열사라 하더라도 양사의 데이터베이스(DB)를 통합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DB 통합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는 수포로 돌아갔다. 게다가 2300억대 불법대출과 주가조작으로 경제계를 뒤흔든 '진승현 게이트' 사건까지 터지면서 회사의 더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다.

네띠앙은 결국 경영난에 허덕이다 125억원까지 적자가 났고, '네띠앙 살리기 운동본부'까지 생겨났지만 회생이 불가능다고 판단한 전 사장은 구조조정을 택했다. 그리고 전하진 네띠앙 사장 본인도 2003년 5월 회사를 떠났다.

◆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정책에 대한 원망

한글과컴퓨터, 네띠앙과 결별하게 된 전하진 대표는 이후에서도 한민족글로벌벤처네트워크 인케 의장, 본웨이브 대표, 인케코퍼레이션 대표 등 끊임없는 사업에 도전했다. 하지만 패자부활에 성공 기미가 보일만하면 번번이 제도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대학생 시절 전하진 전 의원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전하진 전 대표는 "미국 같으면 사업에 실패하면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할 수 있지만 한국은 창업자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스템”이라며 “미국에서 사업 하다 실패한 창업자는 ‘I spent my life(나도 나의 인생을 소비했어)’라고 말하며 투자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이 덜하다"고 말했다. 투자자는 돈을 잃었지만 창업자는 자신의 인생을 투자했다는 점을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업에 실패하면 창업자가 투자자의 돈까지 모두 물어줘야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얘기다.

수차례 창업을 하고 실패를 거듭한 전하진 전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창업자들에 대한 지원 정책이 바뀌지 않는한, 네띠앙·싸이월드 같은 포털 1세대가 구글·페이스북 등에 자리를 내주는 악순환은 멈추지 않을거란 설명이다.

◆ 책 한 권이 바꿔 놓은 전하진 인생

전하진이 2008년 12월 펴낸 '비즈엘리트의 시대가 온다'는 도서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전환점이 됐다. 가능성을 찾아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난 비즈엘리트들의 도전을 소개한 이 책은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그를 정보기술(IT) 전문가로 영입하게 된 계기가 됐다.

20대 국회의원 선거 운동 때 전하진 의원이 성남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비즈엘리트의 시대가 온다' 책을 읽은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은 전하진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고, 만남을 제안했다. 결국 전하진과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 보좌관은 2009년 1월 첫 만남을 가졌다. 정계 입문을 위한 러브콜을 보내기 위한 자리였지만, 전하진은 고사했다.

하지만 '돈 벌기 보다는 세상이 바뀌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전하진은 정계 러브콜을 받아들였다. 2012년 4월 11일에 열린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을 지역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5만2362표를 얻으며 52.59%의 득표율로 국회의원 금뱃지를 달았다.

◆ 아직 다 전·하·진 못한 그의 말… 첨단 자립 마을 '썬빌리지'에 사활

"지금 우리는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다. 기존 경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일은 위기가 아니면 좀처럼 발화되기 어렵. 그렇기 때문에 이번 총선을 통해 새로운 혁신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도약이 가능하게 된다."

2015년 11월 26일 진행된 e러닝 CEO 아카데미에서 전하진 의장이 썬빌리지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재선에 실패한 전하진 전 의원이 19대 국회를 마감하며 남긴 말이다. 그는 신재생에너지를 통한 '또 다른 삶'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썬빌리지'가 그것이다. 현재 썬빌리지 포럼 의장을 맡고 있다. 에너지신산업을 기반으로 전력과 물, 식량을 스스로 생산·소비할 수 있는 자립시스템을 갖춘 마을이다. 전력은 태양광발전으로 충당하고 순환시스템을 이용해 물도 자급자족하며 유휴부지 등을 활용한 작물 재배로 자급자족한다.

전 의장은 19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신재생에너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산업화가 뼈를 만들고, 근육을 만드는 것이라면 정보화는 여기에 신경망을 세웠다. 그리고 이제는 지능화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썬빌리지 프로젝트 성공을 향한 마라톤은 끝나지 이제 시작이다.

전 의장은 "국회가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정권이 5년마다 바뀌면 적어도 한 곳에서는 장기적으로 봐야한다"며 "긴 숨을 가지고 방향을 잡아서 가야한다"고 말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열정도 끝나지 않았다. 21대 국회에 또 한 번 도전장을 던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