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이탈리아 자동차업체 피아트 크라이슬러의 자동차부품 계열사 마그네티 마렐리를 30억달러(3조3540억원)에 인수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4일 관련 업계와 증권시장이 술렁였다. 삼성전자는 "센서나 반도체, 디스플레이, 인포테인먼트 등 자동차 전장(電裝·전기전자 부품) 사업을 추진하려는 것일 뿐"이라면서 선을 그었지만, '삼성이 자동차업에 다시 진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삼성그룹은 1995년 삼성자동차를 만들면서 자동차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적자에 시달리다 2000년 르노자동차에 지분을 매각하고 철수했다.

이날 주식시장에서 코스피는 0.26% 올랐지만,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등 현대차그룹 주요 계열사 주가는 0.5~1.1% 떨어졌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날 보고서를 내고 "삼성이 가진 역량이 자동차 시장에서 발휘되면 국내 차 시장을 장악한 현대차엔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삼성전자 이번 행보가 현대차 그룹과 계열 부품 업체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삼성, 완성차 시장 다시 노리나

마그네티 마렐리는 세계 30위권 자동차 부품회사로 작년 매출은 9조100억원 정도다. 자동차용 파워트레인, 조명, 차량용 엔터테인먼트, 텔레매틱스 제품 등을 생산한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다른 자동차 부품 회사도 인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전장팀을 만든 이후 올 들어 차량용 반도체 개발 태스크포스, 자동차용 반도체 전용 생산 라인을 구축했고, 지난달 세계 1위 전기차 제조업체 중국 비야디(BYD) 지분 2%를 5000억원에 사들였다.

이를 두고 삼성이 처음에는 전장 부품사업으로 출발한 다음 점차 영역을 넓혀 결국에는 완성차 생산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자동차 시장은 점차 자동차와 비(非)자동차 업체 간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미래로 불리는 자율주행차 시장만 보더라도 구글·애플 등 정보통신(IT) 대기업들이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데 삼성전자라고 관망만 하고 있을 리 없다는 해석이다. 김영혁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앞으로 자동차 생태계는 IT 기업, 자동차 제조업체, 통신 서비스 업체가 업종을 떠난 주도권 다툼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실제 삼성벤처투자를 통해 지난 1월과 5월 미국 실리콘밸리 무인차 개발 스타트업 누토노미(nuTonomy)에 투자한 바 있고, 삼성종합기술원에서는 무인차용 엔지니어·연구원을 선발, 관련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 내 스타트업 투자를 총괄하는 글로벌이노베이션센터(GIC)는 무인차용 소프트웨어나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 음성인식 관련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들에 투자하기 위해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그룹에서 최근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분야는 무인차"라면서 "GIC가 사실상 이재용 부회장 직속 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삼성은 공식적으로 "전장 사업을 통해 완성차 업체들에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완성차에 뛰어든다는 건 오히려 지금 사업 구조에 불리하다"고 해명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승부수

삼성의 자동차 시장에 대한 관심은 핵심 사업인 스마트폰 시장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 규모는 4000억달러인 반면, 자동차는 그 4배인 1조6000억달러로 시장이 훨씬 넓다. 자동차 전장 부품 시장만 해도 2019년 3000억달러까지 성장할 것이란 조사 결과도 있다. 삼성을 이끄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또 이 부회장은 지난 2년간 삼성 내 화학·방산 계열사들을 한화와 롯데에 매각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키워드로 한 사업 개편을 단행했지만 눈에 띄는 투자는 거의 없었다. 이번 인수 협상 건이 이 부회장이 준비한 승부수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셈이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삼성전자가 전장 사업을 확대하려면 기존 전장 부품 업체를 계속 인수합병(M&A)해야 한다"면서 "하드웨어 중심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중심 융합 산업으로 변하는 자동차 시장에서 삼성이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LG전자 등 전장 분야 경쟁업체들 비상

영향을 받는 건 현대차만이 아니다. 삼성전자에 앞서 오래전부터 전장 사업에 역량을 쏟아붓던 LG그룹은 이번 삼성전자 인수 협상을 보면서 긴장하고 있다. 마그네티 마렐리가 만드는 인포테인먼트, 텔레매틱스 등 부품은 현재 LG전자 사업 분야와 겹친다. 마그네티 마렐리는 자동차 내·외장재도 만드는데 이는 LG하우시스와 경쟁이 된다. 현재 LG전자는 차량용 통신모듈인 텔레매틱스나 오디오·내비게이션 부품을 GM·메르세데스벤츠·폴크스바겐 등에 공급하고, LG화학은 전기차용 배터리를 미국과 중국에 납품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도 LCD뿐 아니라 OLED 디스플레이를 유럽 차량 제조사에 제공할 계획을 갖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확장하고 차량용 반도체 부품 사업을 시작한 SK그룹도 삼성전자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전자업계에서는 "전장 사업이 가전(家電)처럼 삼성·LG가 시장을 주도하는 분야가 아니라 콘티넨털이나 보쉬 등 기존 선발업체들을 공략하면서 파고들어야 하고, 기존 자동차업체와 B2B로 거래 관계를 뚫어야 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당장 직접적인 여파가 닥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래 자동차는 사실상 IT 기술을 결합한 총체적인 결과물이 될 것"이라면서 "삼성전자가 추격하는 업체는 스마트카의 구글과 전기차의 테슬라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동차 전장(電裝) 부품

차량용 정보·오락장치, 디스플레이, 통신장비 등 자동차에 탑재되는 전자 장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최근 스마트카, 전기차 등이 차세대 자동차로 주목받으면서 중요성이 커지는 추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