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고령 바텐더와 현역 최고의 바텐더가 함께 한 바텐딩…
30년 된 여의도 바 '다희'와 3년 된 청담동 바 '르 챔버'의 따뜻한 랑데부

‘다희’와 ‘르챔버’가 진득하게 어우러진 밤이 있었다. ‘다희’는 여의도에 있는 30년 된 바이고 ‘르 챔버’는 청담동의 화려하고 근사한 바다. 이 날의 이야기는 곧 한국의 바(BAR) 문화를 둘러메는 굵직한 두 기둥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청담동 ‘르챔버’의 칵테일 세즈락

◆ 한남동 청담동 일대 트렌디한 바 유행, 하룻밤에 두 곳 뛰는 마니아 층도 생겨

최근 위스키&칵테일 전문 바들이 한남동, 청담동, 홍대 일대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호텔의 근사한 바는 물론, 연남동 골목에 작은 바도 모두 훌륭한 칵테일을 낼 정도로 수준이 높다.

한남동 ‘커피바 K’, ‘스피크이지 몰타르’, 청담동 ‘르챔버’, ‘앨리스’, 포시즌스 호텔 ‘찰스 H’등이 손에 꼽히는 바의 면면들. 이렇게 바가 다채로워지면서 하룻밤에도 바 두군데씩 들리는 매니아 층도 두터워졌다.

요즘 말하는 바(Bar)는 칵테일과 같은 주류에 전문성이 탄탄한 바텐더들이 있는 전문 술집이다. 쾌적한 공간, 섬세하게 맛의 균형을 맞춘 칵테일, 해외 칵테일 유행을 그대로 들여온 메뉴판, 친밀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하는 바텐더, 세월을 품은 고급 위스키 등이 이런 바들의 필수 요소다.

쾌적한 공간, 섬세하게 맛의 균형을 맞춘 칵테일, 해외 칵테일 유행을 그대로 들여온 메뉴판, 친밀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하는 바텐더, 세월을 품은 고급 위스키 등이 이런 바들의 필수 요소다.

물론 술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종업원이 그저 술을 따라주는 바, 눈부실 만큼 으리으리한 외관을 갖추고 ‘술맛’보다는 사기에 가까운 ‘술값’에 방점을 찍는 바들도 ‘바’라는 이름 하에 혼재해있다. 그래서 아직도 ‘바’ 앞에서 ‘유흥주점’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과 3년 전부터 전문 바텐더 중심의 바가 폭발적으로 생기기 시작하면서 또 한번 새로운 부흥기를 맞았다. 그 인기만큼 바 문화를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나가고자 하는 움직임도 커졌다. 그 하나의 움직임이 어느날 밤, 여의도의 오래되고 낡은 바 ‘다희’에서 포착됐다.

여의도에서 30년째 문을 열고 있는 바 ‘다희’의 이명렬 바텐더.

지난 7월 20일, 여의도 낡은 건물 지하에 있는 바 ‘다희’에 청담동의 으리으리한 바 ‘르챔버’의 대표인 엄도환 바텐더가 등장했다. 원룸 반토막만한 작은 바 다희를 30년 째 지키던 이명렬 바텐더가 청담동 르챔버에서 온 엄도환 바텐더에게 하루동안 바를 내주는 작은 이벤트를 열었기 때문이다. 두 바의 바텐더가 한 곳에서 만난 건 단순한 만남을 넘어선다.

◆ ‘울고 넘는 박달재'가 울리는 동네 바 ‘다희'와 청담동 밀실 파티 공간 같은 세련된 바 ‘르 챔버'

먼저 다희와 르챔버는 결이 서로 다르다. 전문 바텐더가 칵테일과 같은 술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두 군데 모두 바(Bar)라고 부를 수 있지만, 분위기는 천치차이다. 다희는 올해 30주년을 맞은 소박한 동네 바로, 사람으로 치면 원로 중의 원로다.

물론 손님의 평균 연령 역시 50세를 훌쩍 넘는다. ‘울고 넘는 박달재’와 같이, 흘러 나오는 음악의 연식도 상당하다. 바텐더가 삐그덕 거리는 찬장 같은 백바(Back Bar)에서 술을 꺼내 데킬라 선라이즈, 갓마더 같은 칵테일을 꽤 독한 스타일로 만드는 동안, 손님은 고추장을 콕 찍은 멸치로 입가심을 한다.

일면 구닥다리 같기도 하고 어딘지 낡아 보이지만, 바라는 공간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 구성은 나이테처럼 탄탄하게 둘러진 곳이다. 바텐더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손님이 있고, 손님과 손님이 서로 친구가 되는 공간이며, 외로울 땐 술 한잔이 살가운 말벗이 되어줄 수 있는 곳…

고급 위스키 컬렉션을 갖추고 있는 르챔버

청담동에 자리잡은 르챔버는 2014년에 문을 연 근사하고 화려한 공간의 바다. 싱글 몰트위스키와 칵테일을 판다. 어둑한 밀실에서 파티를 여는 것 같은 분위기에 먼저 압도되고, 온몸이 쏙 들어가는 푹신한 소파에 휩싸이는 곳이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과 맛의 칵테일은 물론이고 제각각 다채로운 향을 뿜은 위스키도 그득하게 갖췄다. 무엇보다 르챔버의 가장 큰 특징은 체계적으로 훈련 받은 바텐더들이 좋은 술로 섬세하고 복합적인 맛의 칵테일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만큼 칵테일 값도 비싸다. 그렇게 르챔버는 2013년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한 싱글 몰트위스키 전문바의 기류 속에서 ‘바텐더가 중심이 되는 바’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위스키 컬렉션이나 독특한 컨셉으로 승부하던 당대의 바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국내외 바텐더 대회에서 수상기록이 화려한 엄도환, 임재진, 박성민 바텐더가 대표로 있다.

◆30년과 3년의 의미, 그 술맛의 그라데이션

30년 된 바 다희와, 3년 남짓 된 바 르챔버에서 느껴지는 이런 온도 차이는 한국의 바 문화가 얼마나 빠르고 격하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문을 열고 한 자리에서 30년 간 진득하게 손님을 받는 일이 이렇게 드문 현상이라는 건, 한국의 바 문화가 그만큼 흥망성쇠와 단절을 거듭해왔다는 증거다.

30년의 세월과 3년의 변혁이 작은 바 ‘다희'에서 폭발하는 순간은 한국의 바 문화가 시간을 이어 붙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찰나였다.

그렇게 또 다시 반짝 등장했다 사라지는 유행이 돼 버릴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바 업계에 많다. 그들은 과감한 시도들, 흥미로운 아이디어로 생명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앞으로 이 업계에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리라 기대되는 이유다.

다시 7월 20일의 밤으로 돌아가보자. 엄도환 바텐더는 르챔버에서 가져온 몇 가지 술과 시럽으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칵테일을 만들어 다희의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다희를 사랑방처럼 드나들던 중년 여자 손님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경쾌한 셰이커의 소리 사이사이로 환호성이 울렸다.

30년의 세월과 3년의 변혁이 이 작은 바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순간, 한국의 바 문화가 시간을 이어 붙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찰나였다. 이 작은 이벤트를 위해 물밑에서 두 군데 바를 오가며 작업한 유용석(칵테일위크 대표) 씨는 이렇게 말했다. “현역 최고령 바텐더와 현역 최고의 바텐더가 함께 바텐딩을 해본다는 것만으로도 국내 바 문화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습니다. 바 업계의 문제로 지적되어 온 세대의 단절, 역사의 단절을 극복할 단초가 되는 이벤트니까요.”

PS

다희

여의도 동네 바 '다희'는
다희는 오후 4시에 문을 연다. 찾아오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영업시간이다. 한쪽 벽면엔 영어와 한글이 동시에 적힌 메뉴판이 걸려 있다. 대부분은 이명렬 바텐더의 추천대로 마신다. 한잔에 5천원 내외로 놀랍도록 저렴하다. 하지만 데킬라와 보드카 같은 베이스 술이 약 60ml 정도 들어간다. 요즘 유행하는 바들에 비해 거의 2배 정도다. 운치와 펀치가 동시에 있는 칵테일을 마시면서 흘러간 가요를 듣는 재미가 좋다.

르챔버

청담동 밀실 바 '르 챔버'는
르 챔버는 서재 뒷편 비밀스런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바에 앉으면 말끔한 물수건을 먼저 건네고, 프리미엄 생수도 재빠르게 서브된다. 바텐더는 손님의 취향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집어낼 수 있도록 훈련했다. 저녁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등을 이야기하면 가장 어울리는 칵테일 한잔을 맛보게 될 테다. 커버차지라고 부르는 자리값이 1만원, 칵테일이 1만8천원 정도하지만, 그만큼의 경험을 누릴 수 있다.

◆ 손기은은 남성 라이프스타일 월간지 ‘GQ KOREA’에서 음식과 술을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로 9년 째 일하고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레스토랑의 셰프부터 재야의 술꾼과 재래시장의 할머니까지 모두 취재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요즘은 제대로 만든 칵테일 한 잔을 즐기기 위해 바와 바를 넘나드는 중이다. 바람이 불면 술을 마신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