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연(서울대학교 캠퍼스 안 연못)에 살얼음이 낄 정도로 춥던 2007년 1월 어느날,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재학생 네 명이 과방에 모여 앉았다. 평소에 컴퓨터 프로그램은 물론 피규어, 프라모델 등 장난감까지 직접 만들곤 했던 네 사람은 취미 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보기 위해 동아리를 결성하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와플을 먹고 있던 한 사람이 운을 뗐다. “와플스튜디오 어때?” 그렇게 동아리 이름을 와플스튜디오라고 지었다.

학부생 네 명이 모여 만든 동아리는 익명 강의평가 서비스를 만들어 2만여명의 학우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강의평가 내용때문에 일부 교수들이 학교 전산실로 찾아가 서비스의 폐쇄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와플스튜디오의 이름은 서울대는 물론 타 학교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그로부터 4년 후, 와플스튜디오는 첫번째 스타트업 울트라캡숑을 배출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와플스튜디오 출신인 울트라캡숑은 소셜 데이팅(온라인상에서 이성(異性)을 소개 받는 것) 서비스 ‘너말고 니친구’, 다이어트 애플리케이션 ‘다이어터’ 등을 개발한 뒤 카카오에 매각됐다. 지난해 11월에는 울트라캡숑 창업 멤버들이 그대로 나와 42컴퍼니를 설립,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스마트폰 잠금화면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성원 42컴퍼니 공동 창업자

이성원(32)은 와플스튜디오 창단 멤버로서 울트라캡숑의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현재는 42컴퍼니의 맏형으로서 ‘정신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직함이나 직책은 없다. 위계 질서 없이 평등한 조직 문화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42컴퍼니 사무실에서 이성원을 만났다. 사실 처음엔 42컴퍼니측에서 8명의 직원 모두 인터뷰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모두 와플스튜디오 시절부터 함께해 온 동료들인 만큼, 한 명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판단에서였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이성원은 “42컴퍼니의 모든 직원들이 대표이사나 다름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현재 대표이사는 이성원의 친구인 허승이 맡고 있다). 그래서일까, 8명의 멤버들에게서 직장 동료를 넘어선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취미로 시작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결국 업(業)이 됐네요. 9년 전 와플스튜디오를 만들 때부터 창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가요.

“그건 아니었어요. 1학년때부터 선후배들과 모여서 괜찮은 프로그램을 몇 개 만들었는데, 우리끼리만 사용하고 없애는 게 아깝더군요. 그래서 더 많은 학우들이 우리가 만든 프로그램을 같이 쓰면 좋겠다는 생각에 동아리를 만든 거에요.”

-어릴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좋아했나요.

“초등학교 6학년때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라는 RPG 게임을 즐겨 했어요. 컴퓨터에 디스켓을 넣어 오프라인으로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게임을 하다보니 점수를 더 높이고 싶다는 욕심이 들더군요. 그래서 혼자 책을 뒤져보며 게임 데이터를 열어보는 방법을 배웠어요. 데이터를 열어 일종의 해킹을 통해 고득점을 달성한 거죠. 그 때부터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 살았어요.”

이성원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빠지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그의 아버지는 오랜 기간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뒤 기타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이성원 역시 아버지를 닮아 어릴 때부터 뭔가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컴퓨터 게임이 학업 성적에는 별 영향을 안 줬나봅니다(웃음).

“매일 게임에 빠져 살다보니 중학교 2학년 때 성적이 많이 떨어졌어요. 어느날 부모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컴퓨터를 전문적으로 공부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으셨어요. 진지하게 제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고 제안하신 건데, 저는 혼이 나고 있다고 생각해 겁이 났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그래도 결국 대학에서 컴퓨터공학부에 들어갔네요.

“전기컴퓨터공학부 04학번으로 입학했죠. 사실 수학능력시험 성적에 맞춰서 지원한 거에요(웃음).”

-와플스튜디오에서 강의 평가 서비스를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울대 학사포털에 학생들이 강의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지만, 사실 교수님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솔직한 평가를 하긴 힘들잖아요. 학교에서 교수님의 위치는 막강하니까요. 그래서 2008년 학사포털과는 독립된 별도의 강의 평가 서비스 ‘SNUEV’를 만들었어요.”

-학생들이 많이 이용했나요.

“수만개의 강의 평가가 쌓였어요. 학생들이 수강 신청을 하기 전에 우리 사이트에서 강의 평가를 미리 읽어보더군요. 일부 교수님들은 반발했지만, 어떤 교수님들은 직접 사이트에 가입해서 강의 평가를 읽어보곤 다음 강의에 참고하기도 했어요.”

42컴퍼니 창립 멤버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가은, 황유성, 황호성, 곽서현, 신해인, 김규덕, 이성원, 허승 대표이사. 이 중 박가은과 황유성은 울트라캡숑부터 합류했고 허 대표는 이성원의 대학 동기이며, 나머지는 와플스튜디오부터 함께해온 사이다.

학업과 동아리 활동을 병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이성원은 2009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돌연 교환학생으로서 스웨덴으로 떠났다.

-보통 교환학생은 미국이나 서유럽으로 많이 가던데, 왜 스웨덴을 택한 건가요.

“쉴 틈도 없이 너무 바쁘게 살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학기엔 외국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 떠났어요. 스웨덴 웁살라대학교가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와 잘 연계돼있어 교환학생으로 가기 쉽더군요.”

-스웨덴에서도 프로그래밍을 계속 했나요.

“웁살라대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티다(Tyda)’라는 현지 벤처 기업을 소개해주더군요. 영어를 스웨덴어로 번역해주는 업체였어요. 제가 한국에서 프로그래밍을 하다 왔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폰 프로그래머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준 거에요. 그 때 처음 아이폰으로 코딩을 해봤고 페이팔로 월급도 받아봤어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울트라캡숑은 어떻게 창업하게 됐나요.

“2011년, 와플스튜디오 선배의 소개로 권도혁 전 대표이사를 만났어요. 권 대표가 같이 사업할 팀을 찾던 중에 와플스튜디오를 보고 동업을 제안한 거죠. 저는 그 때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창업에 합류할지 말지 고민했습니다.”

이성원은 고민 끝에 울트라캡숑 창업 멤버로 합류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도교수에게 “1년만 올인해보고 만약에 사업이 잘 안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교수는 “대학원을 떠나는 건 좋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가라”고 했다. 이성원은 지금도 지도교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울트라캡숑에서 출시한 ‘너말고 니친구’라는 서비스는 지금도 기억 나네요. 정말 특이했어요.

“너말고 니친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반으로 만든 데이팅 앱이었어요. 페이스북 친구의 친구들 중 이성의 사진을 두장씩 보여주고, 이상형에 가까운 쪽을 택하도록 했죠. ‘이상형 월드컵’과 비슷한 토너먼트 형식이었어요. 최후의 1인에게는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어요. 지인 중에서 너말고 니친구로 연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어요.”

-너말고 니친구를 운영하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습니까.

“당시 서비스 가입자 중 고등학생의 비율도 상당히 높았는데, 하루는 한 학생의 어머니가 회사로 전화를 했어요. 자녀가 아이템을 너무 많이 구매했다고요. 울트라캡숑측 잘못은 아니었지만, ‘저희가 좀 더 잘 하겠다’고 대답했죠(웃음).”

너말고 니친구는 한국과 대만에서 출시돼 약 100만명의 이용자를 모았다. 일간 이용자 수(DAU)는 평균 3만~4만명에 달했고 5만명을 기록할 때도 있었다.

울트라캡숑은 너말고 니친구 외에도 대학생용 SNS인 ‘클래스메이트’와 다이어트 앱 ‘다이어터’를 출시했다. 클래스메이트는 미국 하버드대에서도 사용하는 앱이 됐고, 다이어터는 100만건 이상 다운로드됐다. 출시한 서비스 대부분이 성공적인 지표를 보여줬다. 하지만 고민도 있었다. 유료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탓에, 자금난에 부딪힌 것이다.

-왜 처음부터 유료화 방안을 고민하지 않았나요.

“그 때는 경험이 너무 부족했어요. 그저 사람이 많이 모이면 서비스가 잘 되고, 서비스가 잘 되면 유료 아이템 판매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 거에요. 하지만 회사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고 투자금이 바닥나고 나니 먹고 살 길이 안 보이더군요.”

2014년, 선택의 기로에 놓인 울트라캡숑 앞에 카카오가 나타났다. 앞서 2012년 20억원을 투자했던 카카오는 이번에는 아예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증자를 통해 20억원에 권도혁 전 대표의 지분(약 70%)을 전부 사들이기로 했다.

-카카오가 투자에 이어 인수까지 한 것을 보면 울트라캡숑에 큰 매력을 느꼈나봅니다. 이유가 뭘까요.

“우리 팀의 강점은 귀가 열려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공학도나 프로그래머들은 제품도 자기 중심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긱(geek·특정분야에 강한 지적 열정을 가지는)한 사람들이 많아요. 기술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서비스만 만든다든가… 그런데 우리 팀은 보편적인 시각으로 공학도가 아닌 일반 사용자들이 좋아할 만한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울트라캡숑을 운영할 당시 전직원이 촬영한 사진. 가운데 회색 니트를 입은 사람이 이성원.

-초기 투자 금액과 경영권 인수 금액이 같은데, 그 사이 회사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가격 수준)이 낮아진 건가요.

“정확히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랬을 겁니다. 당시 인수 조건에 따르면, 카카오가 울트라캡숑과 공동의 목표를 설정해 그것을 달성할 경우 밸류에이션을 높여서 나머지 멤버들이 갖고 있던 잔여 지분을 전부 사주기로 했어요.”

-그래도 밸류에이션을 낮춰서 회사를 매각한 건데, 창업자 입장에서는 아쉬웠겠습니다.

“아쉬움이 있었죠. 밸류에이션을 낮춘 것보다도 다이어터와 너말고 니친구를 독자적으로 좀 더 키워보지 못한 게 더 아쉬웠어요.”

울트라캡숑의 경영권이 카카오에 매각되며 권 전 대표는 회사를 떠났다. 이후 이성원이 대표이사직을 맡아 2015년 말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카카오는 왜 퇴사한 겁니까.

“울트라캡숑 멤버들끼리도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꾸준히 의논했어요. 그러던 차에, 인도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권 전 대표에게 인도의 선불 폰 시장에 대해 듣게 됐어요.”

이성원의 설명에 따르면, 인도 인구 13억명 가운데 선불 스마트폰 사용 인구는 약 2억2000만명으로 추산되며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의 소득 수준이 높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소득의 상당 부분을 스마트폰 이용료로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에서 ‘캐시슬라이드’와 비슷한 제품을 출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캐시슬라이드는 스마트폰 이용자가 잠금 화면을 해제할 때마다 광고를 보고, 광고주로부터 현금을 받을 수 있는 플랫폼이다. 인도에서는 현금을 주는 대신 선불 폰 요금을 대신 충전해준다면 이용자들의 반응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11월, 42컴퍼니는 인도와 파키스탄 시장에서 ‘슬라이드(Slide)’를 출시했다. 올해 1월에는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로부터 6억원을 투자 받았다.

-반응은 어떤가요.

“현재까지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130만명이 넘는 이용자를 확보했어요. 출시한 지 약 반년 만에 100만 다운로드를 돌파했죠. 스마트폰 인터넷 이용료를 절반 수준으로 줄일 수 있는 셈이니 젊은 친구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슬라이드의 다음 목표는 1000만명이다. 내년 초까지 1000만명의 이용자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현지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지사에 각각 4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파키스탄인으로서 42컴퍼니 창업 멤버로 합류한 주네이드 말릭(Junaid Malik)은 이미 한 차례 회사를 창업해 매각한 경험이 있는 스타 벤처 사업가다.

-42컴퍼니의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1000만 다운로드를 달성하면 인도의 모든 앱 가운데 상위 20위 안에 들게 될 거에요. 인도에는 1000만명의 사용자를 보유한 서비스가 많지 않거든요. 그렇게 되면 통신사와 협업할 수도 있고 현지 업체와의 M&A 등 다양한 기회를 잡을 수 있겠죠. 그 다음 목표는 이용자를 1억명 모으는 거에요.”

-사용자 1억명을 모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인도 인구가 13억명이고 파키스탄 인구는 2억명이에요. 두 나라 인구를 모두 합치면 중국보다 많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성원에게 2015년은 두번째 창업에 도전한 뜻깊은 해이기도 하나,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해다. 지난해 9월, 그는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와 와플스튜디오 후배로서 9년 간 사업을 함께 해온 곽서현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가족 같은 집단 안에서 ‘진짜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이성원에게 부부가 한 회사에서 일하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하루종일 얼굴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며 멋쩍은 듯 웃었다.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자신감이 필요해요. 설령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다른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이 있어야 좀 더 자신감을 갖고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어요. 그리고 스타트업은 대표이사 한 명의 힘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좋은 팀’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거든요.”

-만약 42컴퍼니를 매각한다면, 또 다시 창업할 생각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세 번째 창업도 이 친구들(42컴퍼니 창업 멤버들)과 같이 할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