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신도시와 지방 대도시 등을 중심으로 소나기 입주가 몰리면서 주변 지역 전세가격이 내려가고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역(逆)전세난이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국지적 현상이지만, 2017년과 2018년 전국에 쏟아질 아파트 입주 예정물량이 70만여가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면서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전세가격이 한동안 하락 조정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조선비즈가 전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역전세난의 실상과 전망을 살펴봤다. [편집자 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 리센츠’ 전용면적 84㎡ 아파트를 갖고 있는 김정민(53) 씨는 최근 전세 만기가 끝나자 자신의 집에 입주했다. 전셋값을 8억원에서 7억5000만원까지 낮췄지만 새 세입자를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다. 기존 세입자는 해외로 발령받아 보증금을 하루빨리 돌려줘야 하는 상황. 김씨는 따로 은행 대출을 받아 전세보증금을 돌려줬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고덕 아이파크’ 전용면적 59㎡를 전세 임대를 하던 최진수(48) 씨는 얼마 전 계약 만기를 앞둔 세입자로부터 보증금을 돌려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인근 하남 미사지구에 지은 새 아파트에 전세를 구해 8월 말에 이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최씨는 4억9000만원에 전세를 내놨지만, 두 달 가까이 세입자를 찾지 못했다. 다급해진 최씨는 4억7000만원까지 전세가격을 낮췄지만 아직까지 세입자를 구하지 못한 상태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트리지움 아파트.

최근 대규모 입주가 진행 중인 서울 일부 지역과 신도시, 지방 대도시를 중심으로 ‘역(逆)전세난’이 발생하고 있다. 전세물량이 대거 풀리고 있지만 그만큼 수요는 뒤따라주지 않아 전세가격이 날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세입자에게 전셋값을 더 내지 않으면 나가달라고 요구했던 집주인들은 이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앞으로 전국 곳곳에 쏟아질 입주물량을 고려하면 이런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 송파·강동 반년 만에 전세 5000만원 ‘뚝’

26일 찾은 위례신도시와 하남미사강변도시(하남신도시) 일대 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최근 이들 지역에는 전세물량이 넘쳐 임차인을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올해만 두 신도시에서 2만1311가구가 쏟아질 예정이다.

경기 하남미사강변도시 18단지. 다음달부터 입주가 시작된다.

하남신도시의 경우 전용면적 74㎡의 전세 호가가 2억7000만~2억8000만원, 84㎡의 경우 2억9000만~3억2000만원 정도다. 이는 올해 초보다 평균 5000만원 이상 떨어진 가격이다. 하지만 세입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달 입주를 앞둔 미사강변도시 19단지의 경우 180건이 넘는 전세물량이 시장에 나와 있다.

하남 미사동 M공인 이혜연 대표는 “거리상 가까운 서울 강동구나 송파구 주민들이 새 아파트가 많은 하남에서 전세를 많이 구하고 있지만, 올해 하남지역 입주가 워낙 많아 전세가격이 날로 떨어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들 신도시와 가까운 서울 송파구와 강동구 아파트 전셋값이 당장 영향을 받고 있다. 송파구 현지 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잠실동 엘스·리센츠·트리지움 등 2007~2008년에 입주한 잠실 아파트 전용면적 84㎡의 경우 올 초보다 5000만~8000만원 떨어진 7억5000만원 안팎의 전세 물건이 나와 있다. 수요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전용 59㎡ 역시 2000만~3000만원가량 떨어진 6억7000만~6억8000만원에 시세가 형성돼 있다.

잠실동 잠실1번지 공인 관계자는 “최근 잠실엘스 전용면적 84㎡ 전세가 7억5000만원에 계약됐는데, 한두 달 전만 해도 7억8000만원은 나갔던 집”이라면서 “집을 사서 나가겠다는 세입자가 보증금 반환 독촉을 하다 보니 집주인이 어떻게라도 새 임차인을 구하기 위해 전세 가격을 낮춘 경우였다”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 강일동 강일리버파크 1단지.

하남시와 길 하나를 사이로 마주 보고 있는 강동구 강일동과 고덕동도 상황은 비슷하다. 2008~2009년에 입주한 강일리버파크 전용면적 84㎡는 3억5000만~3억6000만원에 전세 시세가 형성돼 있는데, 올 초보다 5000만원 이상 떨어졌는데도 세입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전용면적 59㎡는 3억1000만~3억2000만원 정도인데, 7개월 만에 1000만~2000만원가량 호가가 떨어진 수준이다. 고덕동도 고덕 아이파크를 비롯한 일대 아파트 전세 호가가 면적별로 평균 2000만원 정도 하락했다.

강일동 H공인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집주인들이 전세 보증금을 올리면 세입자가 아무 말 못하고 나가곤 했는데, 올해 들어선 시장 상황이 역전됐다”면서 “이젠 세입자들이 나간다고 통보하고, 집주인은 ‘다른 세입자가 올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사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개업계는 송파 강동권 일대의 전셋값 하락 추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잠실동 Y공인 관계자는 “앞으로 하남이나 위례신도시에서 계속 입주물량이 풀리고, 내년에는 강동구에서도 4000여가구, 내후년에는 송파구에서도 9000여가구가 입주할 예정이라 전셋값은 한동안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노원·성동도 역전세난 조짐

올해 상반기만 총 3400여가구의 입주가 진행된 구리 갈매지구 및 의정부 민락지구 인근 노원구나 왕십리 새 아파트의 입주물량이 많은 성동구 아파트도 전세가격이 조금씩 빠지고 있다.

노원구 상계동 상계주공아파트는 최근 면적별로 500만~1000만원 정도 전세 호가가 낮아졌다. 성동구 응봉동 부동산1번지 공인 관계자는 “전세가 잘 안 나가다 보니 세입자가 들어올 때 도배나 수리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집주인들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 응봉동 금호현대아파트.

수도권뿐 아니다. 대구와 경북 구미 등 입주물량이 쏟아지고 있는 지방 대도시에서도 세입자를 찾지 못한 집주인들이 속출하고 있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 구미는 올 한 해만 각각 2만6599가구와 5083가구의 입주가 진행될 예정이다.

대구 달서구 본리동 H공인 관계자는 “대구 전체적으로 전셋값이 수천만원이 넘게 떨어졌다”면서 “집주인들 일부는 손해 보기 싫어 전세를 반전세로 돌리려 하는데, 반전세로 계약하려는 세입자는 더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북 구미 도량동 S공인 대표는 “호가보다 가격을 크게 낮춘 ‘급전세’ 외에는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은행 대출을 받아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는 사례도 꽤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