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피해자 대표 소송으로 모든 피해자 배상 받는 '미국 집단소송제'
폭스바겐 미국서 17조 배상 합의, 한국 소비자엔 '빈손'… 野 "전면 도입하자"

배기가스 조작 스캔들을 일으킨 독일 자동차 업체 폭스바겐은 최근 미국 소비자에 대한 피해 배상금으로 총 147억달러(약 17조4000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폭스바겐의 집단소송 합의에 따라 배출가스가 조작된 2000㏄급 디젤 차량의 소유주 미국인 A씨는 집단 소송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최저 5100달러(약 580만원)~ 최고 1만달러(약 1136만원)까지 배상금을 받게 됐다. A씨와 같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미국 소비자는 약 47만50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역대 집단소송 합의액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같은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차량 ‘골프 1.4 TSI’를 갖고 있는 한국인 B씨는 폭스바겐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이 아직 ‘0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씨가 소유한 폭스바겐 중고차 시세는 12% 하락해 다른 유명 수입차 브랜드보다 낙폭이 두 배나 커졌다. 한국인 B씨는 미국처럼 집단소송을 통해 배상금을 받을 수 있는지 법무법인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한국은 소비자에 대한 집단소송제가 도입되지 않아 직접 원고로 참여해 다른 피해자들과 공동소송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소송을 직접 제기하지 않으면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 못한다는 소식도 듣게 됐다. 현재 한국에서 폭스바겐에 집단 소송을 제기한 원고인 수는 약 4500명에 불과하다. 폭스바겐은 미국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의 배상 예상 인원을 보며 ‘배짱’을 부리고 있다.

지난 2010년 해킹으로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입은 옥션 가입자 14만명은 옥션을 향해 공동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옥션의 배상 의무를 인정하지 않아 소비자들은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 못했다. 지난 2011년 싸이월드와 네이트의 3500만명 회원정보가 유출된 사건은 소비자들의 공동소송으로 배상이 이뤄졌다. 그러나 배상금은 원고 1인당 20만원이었다. 소송비용과 인지대를 제외하고 나면, 실제 손에 쥐는 돈은 고작 ‘수만원’이었다.

지난 2007년 미국에서는 금융서비스 회사인 서티지 체크 서비스(Certegy Check Services)의 개인정보 관리 책임자가 정보 브로커에게 돈을 받고 850만명의 고객 정보를 넘겨준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1인당 2만달러(약 2273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미국과 한국의 소비자가 이처럼 제품 피해에 대해 다른 배상을 받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한국에 ‘집단소송제’가 전면 도입되지 않고 있어서다.

◆ 폭스바겐, 가습기 살균제 사태…소비자 피해 해결할 ‘집단 소송제’ 도입법 나와

최근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 소비자에 대한 피해 사건이 잇따르자 적절한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대 국회에서는 일부 야당 의원들이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집단소송 제도’를 한국에 전면 도입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6일 미국식 집단소송제도를 모든 소송 분야에 도입할 수 있는 ‘집단소송법’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집단소송제도를 소비자 피해에 도입하는 ‘집단소송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집단소송 제도는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 피해자 중 일부가 소송을 제기하면, 나머지 피해자들도 소송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폭스바겐 사건을 예를 들면 배출가스를 조작한 차량을 소유한 일부 피해자들이 폭스바겐에 집단소송을 제기한다. 폭스바겐이 집단소송에서 패소하거나 패소 전 피해자들과 합의를 할 경우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던 잠재적 피해자로 추정되는 모든 소비자들은 소송 결과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피해자 개개인이 원고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대표 당사자의 소송으로 피해자 전원에게 판결의 효력이 미치도록 규정한 것이다.

미국의 피해 소비자들은 법원이 집단소송 내용을 고지할 때 제외 신고(소송 결과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Opt-out 방식)를 따로 하지 않을 경우 잠재적 피해자로 분류돼 동일한 피해 내용에 대한 집단소송의 배상을 원고 피해자와 같이 받게 된다.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던 피해자들도 집단소송이 승소하면 피해 사실만 입증해 배상금을 받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월마트의 피츠버그 점포 여직원 6명이 지난 2001년 승진과 보수에서 차별을 당했다며 집단소송을 시작했는데, 비슷한 피해자의 배상 예상 인원이 약 150만명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한국은 지난 2005년 증권 분야에 한해 제한적으로 집단소송 제도를 도입해 실행 중이다. 증권거래 과정에서 50명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 일부가 대표 당사자로 소송을 하면 나머지 피해자들은 자동으로 판결 효력에 따라 구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증권업 외 소비자 피해, 인터넷의 사생활 보호 등 모든 분야의 소송에서는 집단소송 제도를 사용할 수 없다.

소비자 피해의 경우 한국은 집단소송 제도 대신 민사소송법상의 공동소송제와 선정당사자 제도, 소비자기본법의 단체소송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시민단체와 야당 일부 의원들은 이러한 제도들은 늘어나는 소비자 피해를 막기 역부족이라고 주장한다.

공동소송제도는 현재 폭스바겐 피해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이 직접 법무법인에 신청해 공동소송의 원고가 되는 것이다. 집단소송제도와 다른 점은 공동소송제도는 소송에 참여한 피해자만 재판 결과에 따른 배상을 받을 수 있다. 또한 피해자 개개인은 모두 원고가 돼 법무법인을 통해 소장을 제출해 재판에 참여해야 한다. 폭스바겐 사건처럼 법무법인이 4500명의 피해자들을 원고로 모아 재판을 진행한다고 보면 된다. 집단소송제는 법적으로 가능 인원(현재 증권 분야 집단소송 기준 인원 50명)만 재판에 참여해도 모든 피해자가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과 다르다.

선정당사자제도는 피해자들이 사전에 대표 소송자를 한명 뽑은 후 대표 소송자가 전원을 대신해 소송을 수행하는 제도다. 이 방식은 피해자들이 모두 모여 대표 소송자를 선정하는 절차를 거쳐야 해서 광범위하고 복잡한 소비자 피해 소송에는 맞지 않다. 아파트 하자에 따른 입주민들의 소송 같은 소규모 집단의 소송에 활용된다.

소비자기본법의 단체소송은 금전적 배상을 받을 수 없다. 소비자권익침해행위의 금지·중지를 구하는 소송이며, 공정거래위원회에 등록된 소비자 단체만 단체소송이 가능하다.

한국의 소비자 피해 소송과 미국의 집단소송 비교

◆ 미국처럼 전 분야 ‘집단 소송’ 도입…남소(濫訴) 우려 vs 지나친 걱정

사진=연합뉴스

박영선 의원의 ‘집단소송법’은 적용 범위 조항이 없다. 모든 분야의 소송에 집단소송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모든 분야의 집단소송을 가능하게 해 의학적 사용, 직장에서의 급여·승진과 관련한 여성차별, 취업 시험 내용의 인종적 편견, 경찰의 불법 검문·검색, 통신에 대한 감시, 소비자를 오도하는 광고, 자동차의 급유 시스템과 관련한 가솔린 중독, 크레딧 카드 사용에서 발생하는 연체료와 벌금 등 여러 주제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기업들은 모든 분야의 집단소송제 도입은 남소(濫訴) 위험이 있다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집단소송은 변호사들에게 많은 보수를 기대할 수 있는 제도다. 기업들은 집단소송이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기 때문에 소송 전 합의를 보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경우 집단소송의 원고와 피고는 각각 자신들이 쓴 비용을 부담하고, 원고의 변호사 비용은 성공 보수로 피고로부터 받은 배상액에서 지불된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무의미한 소송들이 남발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정 기업을 계획한 표적 소송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010년 미국 기업들은 국내총생산(GDP)의 1.8%에 해당하는 2650억달러(약 301조)를 집단소송을 포함한 다양한 불법행위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지출했다.

유럽연합(EU)은 이같은 이유로 집단소송 개선 논의를 시작하면서 미국식 제도를 논의에서 제외시켰다. 지난 2013년 6월 EU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안을 제시했는데, 피해자가 직접 소송을 신청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다양한 남용 방지 장치를 마련하라는 내용이었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상 소송제도가 소액 다수 피해자들의 손해를 완벽히 배상해 주는데 2% 부족한 게 사실이다”면서도 “그러나 집단소송제도 자체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2%를 채우려 할 경우 그 이상의 사회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에서도 실제로 집단소송이 끝까지 판결로 가는 경우가 없다”며 “기업들이 못 견디고 중간 단계에서 협상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집단소송 제도를 도입하자는 전문가들은 남소 가능성이 지나친 걱정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근거는 지난 2005년 도입된 증권업 집단소송제도의 적은 소송 횟수다.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은 지난 2005년 1월부터 시행됐지만, 현재까지 제기 된 소송은 9건에 불과하다. 허가결정이 확정된 건은 2건이며, 실제 본안소송 단계에 이른 사건은 1건이다. 집단소송 제도 도입에 찬성하는 전문가들은 증권업 집단소송제의 도입 결과를 보면 전 분야로 확대해도 남소 가능성은 적다고 주장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지지하는 변호사, 교수 모임(징손모)’ 이장희 사무총장은 “증권 분야 집단소송제가 도입 10년이 됐지만, 소송은 9건 밖에 안된다”며 “집단소송제도를 전 분야로 확대했다고 소송이 남발된다는 것은 반대하는 사람들의 현실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현재 전문가들은 증권업 집단소송제가 활발하게 활용되지 못한 것에 대해 까다로운 절차를 이유로 꼽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집단소송 허가결정에 대해 즉시항고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증권업 집단소송은 본안심리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허가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허가절차는 3심제다. 피고는 집단소송이 들어오게 되면 곧바로 즉시 항고가 가능하다. 현행 민사소송법은 즉시항고가 제기되면 집행정지가 되는 효력을 부여하고 있다. 1심의 소송허가결정에 대해 피고 측이 즉시항고하면 본안소송의 절차를 개시할 수 없게 되고, 2심의 허가절차에서 다시 허가결정을 받아도 이에 대한 재항고로 다시 절차가 중단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허가사건에 대해 3심, 본안사건에 대해 또 다시 3심이 진행되는 등 증권 관련 집단소송이 종결되기 위해서는 6심의 재판과정이 소요될 수 있다. 집단소송의 절차가 까다롭자 소송 횟수가 적었던 것이다.

박영선 의원은 ‘집단소송법’에 피고의 즉시항고를 막아 집단소송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신 기업연구실장은 “증권 분야 집단소송제에 남소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피고의 즉시항고 때문인 것도 있는데, 박영선 의원의 법안처럼 규제를 풀면 남소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집단소송의 전 분야 도입은 ‘민사소송’에서 규정하는 참가하지 않은 자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할 소지도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집단소송제도는 피해자가 소송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집단소송이 패소할 경우 같은 문제로 다시 소송을 할 수 없다. 본인이 모르는 사이 소송이 제기돼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본인도 모르게 별도의 피해 소송을 할 수 없는 ‘덫’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