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같은 집에 살면서 충실히 부양하겠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부모가 증여 계약을 해제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유모(76)씨는 지난 2003년 12월 서울 종로구의 2층 주택을 아들에게 증여하면서 이런 내용이 담긴 일종의 ‘효도 계약서'를 받았다. 마지막 노후 자산인 집을 아무 조건 없이 아들에게 물려주긴 어렵다는 생각에 마련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하지만 주택이 본인 명의로 바뀌자마자, 아들은 부모를 홀대하기 시작했다. 허리 디스크로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보지 않았고, 심지어 요양시설에 입원하라고까지 권했다. 서운해진 유씨가 집 명의를 돌려받아 아파트를 사겠다고 하자 아들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아파트가 왜 필요하냐"며 윽박질렀다.

유씨는 결국 아들을 상대로 법원에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0여년의 지리한 법정 싸움 끝에 대법원은 지난해 “아들은 증여받은 재산을 부모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결은 유씨가 아들에게 미리 ‘부모를 잘 모시겠다'는 각서를 받아놓았기에 가능했다.

방효석 변호사(KEB하나은행)는 “성급하게 재산을 물려주었다가 자녀가 불효하는 바람에 후회하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다"면서 “재산을 물려줄 때 효도 계약서 같은 각서를 받아놓지 않으면 자녀가 ‘먹튀 불효자’로 돌변해도 손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진희 디자이너

◆ 효도계약서에 부양 정도·증여 재산 명확히 적어야

효도계약서는 민법상 조건부 증여를 차용한 부모와 자식 간 계약이다. 양식이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자체 양식을 갖고 있는 법률사무소나 금융회사도 있다. 양식이 없더라도 각서 정도의 요건만 갖추면 된다.

내용은 구체적일수록 좋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부양의 정도, 증여하는 재산의 목록과 금액을 상세히 적어야 한다. 계약상 부양의무를 위반했을 때 증여계약을 해제하고 증여재산을 반환한다는 조항도 넣어야 한다. 부모와 자녀의 도장 날인도 필요하다. 이렇게 효도계약서를 작성해 둬야만 나중에 증여 재산에 대해 반환도 주장할 수 있다.
물론 효도계약서를 썼다고 해서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자녀에게 증여 재산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그새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면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더구나 효도계약서가 있어도 피붙이인 자녀를 상대로 소송까지 가기는 쉽지 않다. 앞서 사례에서도 유씨는 10년 동안 아들을 상대로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진행해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김근호 KEB하나은행 상속증여센터장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쉽지만 되돌려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할 경우 가족의 인연이 완전 끊어지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 모두가 고통받는다”고 했다.

A법률사무소의 효도계약서 양식. 효도계약서는 정해진 법률 양식이 없지만, 통상 법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증여할 자산과 조건, 그리고 증여자와 수증자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적어야 한다. 효도를 조건으로 증여한다면, 수증자가 계약 내용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을 경우 증여를 취소한다는 조항을 넣으면 된다.

◆ “효도하면 물려준다” 조건 내거는 어르신들

‘자식에게 재산을 한 푼도 안 주면 맞아 죽고, 반만 주면 무서워서 죽고, 다 주면 굶어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은퇴 생활자들이 주고 받는 농담이지만 요즘 세태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모 집을 찾아와 효도를 할 때마다 재산을 조금씩 증여하겠다는 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많다. 집에 자주 찾아와 효도하는 자녀에게 더 많은 증여를 하겠다는 식이다. 한꺼번에 많은 재산을 물려줬다가 자녀가 재산을 잘못 관리하거나 자칫 나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작용한다.
금융업계에서는 이를 '날 보러와요'형 증여라고 부른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를 빗대 '효(孝)미더머니'라 부르기도 한다. 자녀들이 한푼이라도 재산을 더 증여받기 위해 부모 앞에서 효를 경쟁한다는 의미다.

부모가 사망한 뒤 증여가 시작되는 ‘사인(死人) 증여’도 있다. 사인 증여는 재산을 부모 사망 뒤에 가져간다는 개념이다. 상속은 부모 사망과 동시에 재산이 자녀에게 넘어가지만, 사인 증여는 생전에 부모가 정해놓은 미래의 시점에 재산을 물려주는 방식이다.

절세 혜택은 딱히 없지만, 재산을 자녀에게 온전히 물려주고 싶어하는 자산가들이 사인 증여 방식을 선택한다.

박준오 삼성생명 강남 FP센터장은 “질병에 걸려 사망에 임박한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뒀을 때 재산을 상속하게되면 친척 중에서 후견인이 지정된다”면서 “그런데 친척에게 자산을 맡겼을 경우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재산을 관리하는 후견인이 못 미더울 수 있는데 이때 ‘사인증여’를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계획 없이 증여 잘못했다간 ‘빚더미’

A은행 압구정지점의 VIP고객이었던 장모씨. 그는 금융자산만 100억원을 보유한 자산가였다. 장씨는 8년 전 은행에 30억원을 대출받아 서울 서초구의 상가 건물을 60억원에 매입했다.

장씨는 4년 후 이 상가를 공시지가인 40억원에 아들에게 증여했다. 30억원의 은행 대출도 함께 물려줬다. 아들이 실제 증여받은 금액은 부채 30억원을 제외한 10억원. 아들은 10억원에 대한 증여세만 냈다.

문제는 아들이 금융 지식이 전무했던 것. 아들은 ‘귀찮다’는 이유로 30억원에 대한 이자를 연체하기 시작했다. 월 1000만원에 달하는 이자를 3년 간 연체하자 은행은 결국 압류를 결정했다. 압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아들은 “60억원 짜리 빌딩인데 이자 몇억 내지 않았다고 압류를 하냐”며 버텼다.

결국 지난 6월 이 상가는 경매로 넘어갔다. 아들은 빚도 지게 됐다. A은행 압구정지점장은 “평생 돈을 쓰기만 했던 아들에게 한꺼번에 많은 재산을 증여했다 실패한 사례”라며 “이 사건으로 부자간의 인연을 끊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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