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재스트로 네이처·뉴사이언티스트 한국 담당 기자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엔 투박하게 생긴 세계 최초의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휴대폰 'LDP200'이 걸려 있다. 1996년 선보인 이 휴대폰은 한국 과학기술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정부 연구·개발(R&D) 정책의 대표적 성공 사례이기 때문이다. CDMA 기술은 정부 연구소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미국 퀄컴과 손잡고 개발했다. 1000여명의 연구자와 연간 1조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지금 '한강의 기적'은 '한강의 저주'로 바뀌고 있다. 한국은 과거의 성공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유행을 좇는 정부 주도 R&D를 반복하고 있다. 올해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한국 사회를 강타했을 때도 그랬다. 한국 정부는 알파고를 따라잡겠다며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고, 삼성·현대차·SK 등 대기업을 동원했다. 여전히 CDMA의 공식을 답습한 것이다. 알파고는 정부와 거대 기업이 아닌 영국 벤처의 작품인데 말이다.

한국에도 정부의 역할이 끝났다는 시각이 있긴 하다. 최근엔 미국처럼 대학의 역할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미 정부 연구소는 주요 기관 운영을 대학에 맡긴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대학조차 정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에서 '정부의 역할 축소'는 아예 고려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과학자가 "정부·장관·관료 때문에 장기적 과학기술 정책이 자리를 못 잡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단적으로 한국에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녹색 성장'이나 '창조 경제' 같은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는다. 이로 인해 연구자들은 연구 방향을 바꾼다. 정부 브랜드에 맞춰 포장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과학기술은 경제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성장의 문을 여는 직접적인 '열쇠'는 아니다. 과학기술은 미래에 활용할 재료(연구 성과)를 만든다. 이 재료를 어떻게 쓰느냐는 기업과 사회의 몫이다. 정부가 재료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재료를 결정까지 하면 곤란하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정부 연구소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구글은 대학원생이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박사과정 프로젝트였다. 페이스북은 마크 저커버그의 하버드대학 기숙사 방에서 나왔다. 과학기술과 정책이 한 몸이 돼 한길을 가던 시대의 유산은 '과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CDMA처럼 한국의 성공도 박물관에나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