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2012년 3월 국산 수퍼컴퓨터 '마하(MAHA)'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지식경제부는 "인간 유전체 정보 분석에 최적화된 세계적 수퍼컴퓨터"라고 홍보했다. 마하는 '2014년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도 선정됐다. 마하에는 개발과 운용에 지금까지 300억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ETRI 마하는 국산도, 세계적 수퍼컴퓨터도 아니었다. 마하의 하드웨어는 재미교포 대니얼 김이 세운 미국 회사 '아프로'에서 들여왔고 조립까지 아프로에 맡겼다. 마하 실사에 나섰던 한 수퍼컴퓨터 전문가는 "수퍼컴퓨터의 핵심은 동시에 많은 계산을 하는 '병렬(竝列)연산'인데, ETRI가 개발한 프로그램을 가동하면 병렬연산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퍼컴퓨터의 두뇌인 CPU(중앙처리장치) 상당수가 작동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에서 연구개발(R&D)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기준 4.29%로 세계 1위다. 절대 금액도 미국·일본·중국·독일·프랑스에 이어 세계 6위 수준이다. 올해 정부 R&D 투자액은 19조원이 넘는다. 지난 10년간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 R&D 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2009년 11위에서 지난해 19위로 곤두박질쳤다.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 개발 성공?… 11년된 日기술 그대로 - 올해 2월 3일 운행을 시작한 인천공항자기부상열차 ‘에코비’(왼쪽). 27년간 약 5000억원을 투입해 개발했다. 하지만 핵심 기술의 내용이나 수준이 지난 2005년부터 일본 아이치(愛知)현에서 운행 중인 리니모(Linimo·오른쪽)와 거의 동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현재 시속 500㎞ 급 자기부상열차의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는 '정부 R&D 100% 성공'이라는 허상이 자리 잡고 있다. 실패가 두려워 미래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도전적인 연구는 뒷전이고, 성과를 내기 위해 외국이 한참 전에 개발한 기술을 가져다가 포장만 바꾸기도 한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연간 7000억원이 투입되는 정부 원천기술 개발 과제의 지난해 성공률은 96%에 이른다. '우수'에 해당하는 'A' 등급이 52.4%로 가장 많았고 실패를 뜻하는 'D' 등급을 받은 것은 124개 과제 중 단 한 건뿐이었다. 기초연구도 상황은 비슷하다. 평가 대상 650개 과제 중 3.7%만 'C' 또는 'D' 등급을 받았다. 매년 4조5000억원의 예산을 쓰는 연구재단이 지원하는 사업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의미 없는 수치이다. 연구 성과 중에 기업이 돈을 주고 사가거나 사업화에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작년 정부 과제 최우수 평가를 받은 '차세대바이오매스사업단'의 경우 중소기업 두 곳에 각각 1억원과 300만원에 기술이전한 것을 최대 성과로 꼽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 따르면 정부 연구소들이 보유한 특허 중 71.6%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장롱 특허'이다. 장롱 특허 비율은 2013년 66.4%에서 2014년 68.6%, 지난해 71.6%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김창경 교수는 "막대한 세금을 투자하고도 기술이 축적되지 못한 것은 R&D 성공 조작 때문"이라며 "실패에서 배울 기회마저 차단한 사실상 범죄행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