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2016’ 행사장. 전세계에서 모인 통신 관련 기업들이 5세대(5G) 이동통신 신기술을 앞다퉈 선보였다. 한국 기업인 SK텔레콤도 자사 부스에서 초당 20.5기가비트(Gbps) 속도로 데이터를 실시간 전송하는 5G 기술을 공개했다. 20.5Gbps는 초고화질(UHD) 영화 한 편을 8초만에 내려받을 수 있는 속도다. 롱텀에볼루션(LTE) 속도보다는 약 270배 빠르다.

SK텔레콤 직원이 5G 기술을 시연한 데스크톱 크기의 한 단말기에는 인텔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인텔은 PC에 탑재되는 마이크로프로세서(CPU) 칩 분야의 세계 1위 업체다. 그러나 이번 MWC 2016에는 CPU 제조사가 아닌 5G 기술기업 자격으로 참가했다. 인텔 로고가 새겨진 5G 단말기는 SK텔레콤과 인텔이 공동 개발한 성과물이었다. 인텔 관계자는 “현재 5G 단말기는 꽤 큰 편이지만, 조만간 스마트폰 크기의 5G 단말기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텔은 최근 5G 분야에서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인텔의 핵심 사업은 여전히 CPU다. 그러나 인텔이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는 사물인터넷(IoT)과 클라우드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5G 기술 선점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인텔은 SK텔레콤뿐 아니라 KT, 버라이즌, 에릭슨, 노키아 등 전세계 주요 정보기술(IT) 기업과 5G 기술 개발을 위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올해 2월 22일(현지시각)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열린 MWC 2016에 참가한 SK텔레콤 직원과 인텔 직원이 공동 개발한 5G 단말기를 시연하고 있다.

◆ 5G로 응답 속도 단축…클라우드·IoT 꽃 피운다

인텔은 지난해 ‘모든 것을 위한 클라우드(Cloud for all)’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초연결 시대의 선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클라우드와 IoT 등을 미래 성장엔진으로 제시했다. PC나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 자체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데이터센터의 막대한 컴퓨팅 능력을 활용해 서비스의 질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클라우드와 IoT는 대용량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는 5G 환경이 제대로 갖춰져야 꽃을 피울 수 있다. PC나 스마트폰에서 만들어진 데이터는 모뎀을 통해 기지국으로 전송되고, 다시 네트워크 망을 타고 서버로 유입된다. 서버에서 처리된 데이터가 상대방 단말기로 전달되거나 다시 원래의 기기로 되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응답 속도다. 5G 통신은 이 응답 속도를 1000분의 1초 수준으로 낮출 뿐 아니라 신호가 직접 서버까지 닿지 않아도 중간 기점이 되는 엣지(edge)망에서 데이터 처리가 끝나도록 하는 똑똑한 망이다.

인텔은 ‘소프트웨어정의 네트워크(SDN)’와 ‘네트워크 기능 가상화(NFV)’에 역량을 집중해 지능형 네트워크 기술을 구현하겠다는 전략이다. SDN과 NFV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네트워크를 관리하거나 각종 기능을 추가하는 기술이다. 이전에는 이동통신사가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하려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관련 장비를 도입해야 했다. SDN과 NFV는 별도의 장비 없이 소프트웨어로 제어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장비 마련 부담을 줄이고 통신사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망을 바꿀 수 있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인텔 최고경영자가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6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 주요 IT 기업과 파트너십 구축...퀄컴이 장악한 모뎀칩 시장 뚫는다

사실 2016년 현재까지도 5G 기술표준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기술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정 기업 홀로 풀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인텔도 이를 인지하고 세계 각국의 IT 업체들과 파트너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현재 인텔은 스웨덴 통신장비 제조업체 에릭슨과 함께 5G 네트워크와 클라우드, IoT 분야에서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핀란드 노키아와는 잠정 규격(pre-standard)의 5G 무선기술과 네트워크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 통신사 버라이즌과 인텔은 ‘버라이즌 5G 테크놀러지 포럼’에서 5G 무선 솔루션 구축을 위한 필드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한국 기업들과의 협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인텔은 LG전자와 미래형 자동차에 탑재될 5G 텔레매틱스 기술을 공동 개발하기로 약속했다. KT와는 2018년 시범 서비스를 목표로 5G 무선기술과 가상화 네트워크 플랫폼, 공동 규격 등을 만들고 있다. 또 인텔은 SK텔레콤이 지난해 10월 분당 종합기술원에 개소한 ‘5G 글로벌 혁신센터’에 입주하기도 했다.

5G 관련 세미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중이다. 인텔은 SK텔레콤이 지난 6월 8~9일 이틀간 서울 을지로 SK텔레콤 사옥에서 개최한 ‘텔코 인프라 프로젝트(TIP)’ 회의에 참가했다. TIP는 통신기술 혁신을 추구하는 글로벌 연구단체다. 앞서 4월에는 KT가 서울 동대문 JW메리어트 호텔에서 개최한 ‘5G 생태계 조성을 위한 워크숍’에 참가했다.

인텔의 선순환(virtuous cycle) 성장 청사진

인텔은 5G 분야에서의 노력을 바탕으로 퀄컴에 밀려 제대로 힘을 발휘한 적 없는 모바일 시장에도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는 전략이다. 그간 인텔은 PC 시장에서는 절대 강자로 군림했지만 모바일 시장에서 만큼은 맥을 추지 못했다. 모바일에 탑재되는 칩 시장은 퀄컴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블룸버그는 지난달 10일(현지시각) 애플이 차세대 스마트폰 ‘아이폰7’에 탑재할 베이스밴드 프로세서(모뎀칩) 제조사로 인텔을 지목했다고 보도했다. 모뎀칩은 휴대폰을 네트워크에 연결하고 라디오 신호를 소리와 데이터로 변환하는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인텔의 모뎀칩은 미국 통신사 AT&T가 자국 시장에 보급하는 아이폰7과 일부 해외 시장에 유통되는 아이폰7에 탑재된다. 당초 업계 관계자들은 인텔이 아이폰7용 모뎀칩을 30%가량 공급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재는 인텔 물량 비중이 절반 정도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인텔은 지난 2010년 독일 반도체 제조사 인피니언의 무선사업부를 14억달러(약 1조5953억원)에 사들이면서 통신모뎀 기술을 확보한 바 있다. 2014년에는 아바고 테크놀러지스의 통신 부문 자회사인 악시아를 6억5000만달러(약 7407억원)에 사들이기도 했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응용프로세서(AP) 쪽에서는 여전히 퀄컴의 독주체제이지만, 인텔이 5G 기술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만큼 모뎀칩 분야에서는 좋은 성과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DB

인텔은 극단적인 저전력 통신도 5G의 한 영역으로 보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IoT 기술은 주로 TV나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 전원이 항상 연결돼 있고 전력 소비에 너그러운 기기에 접목돼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모든 센서가 직접 인터넷에 접속되는 세상이 열리게 될 것이다. 인텔은 아주 적은 전력으로 가스 계량기와 방범 카메라, 헬스케어 센서 등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5G 기술을 개발 중이다.

윤은경 인텔코리아 부사장은 “인텔은 5G 통신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실시간 데이터 전송 환경이 자율주행 자동차와 가상현실(VR) 등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차량에 달린 각 센서는 실시간으로 차량 내부의 중앙 컴퓨터와 통신을 주고받아야 하고, 이 컴퓨터는 주변 상황을 수시로 읽고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율주행차는 고성능 프로세서와 고속 통신을 돕는 모뎀칩 및 5G 네트워크 솔루션, 그리고 이 모두를 관장하는 커다란 클라우드 솔루션이 필요한데, 인텔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