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과 금융 위기 등으로 임기 내내 인기가 없었지만,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도 했다. 그중 하나가 꼭 14년 전인 2002년 7월30일 ‘사베인스-옥슬리법(Sarbanes-Oxley Act)’에 서명한 일이다. 폴 사베인스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과 마이클 옥슬리 공화당 하원의원이 발의한 이 법의 정식 명칭은 ‘상장기업 회계개혁 및 투자자 보호법’이다. 에너지 기업 엔론의 초대형 분식(粉飾)회계 사건을 계기로 입법됐다.

엔론은 2000년 파이낸셜타임스가 ‘최고의 에너지 기업’으로 선정하고, 포천이 5년 연속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꼽은 미국의 대표 기업이었다. 주가가 10년(1991~2000년)간 1415%나 오를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했다. 하지만 엔론은 2000년 63억달러인 매출을 1008억달러로 부풀리는 등 대규모 회계부정을 저질렀다 들통났다. 2001년 9·11 테러로 충격을 받은 미국 경제는 3개월 후인 12월2일 엔론의 부도와 파산보호 신청으로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엔론 사태로 주주는 630억달러, 채권자는 176억달러, 파생상품 거래 파트너는 40억달러의 손해를 입었고, 직원 2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엔론의 분식회계를 눈감아 준 회계법인 아더앤더슨도 해체됐다.

엔론(분식회계 규모 15억달러)에 이어 월드컴(38억달러), 타이코(12억달러), 제록스(19억달러) 등 대기업 회계부정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미국 정치권과 재계는 자본시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엄격한 기업 회계감사법을 도입하게 됐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대 교수는 당시 "엔론 사태는 미국 경제에 테러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미국 경제시스템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베인스-옥슬리법의 핵심은 기업의 내부회계관리를 강화한 것이었다. 재무부서에서 작성한 회계장부를 기업 내부 감사위원회가 감사해 매출액과 영업이익 등 장부상의 각종 숫자가 실제와 맞는지, 부풀리거나 축소한 것은 아닌지 찾아내도록 했다. 기업 CEO가 회계보고서(사업보고서)에 서명하도록 해 장부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면 중벌을 받게 했다. 또 감사위원회에 이어 기업의 외부감사를 하는 회계법인은 그 기업의 경영자문(컨설팅) 업무를 동시에 맡지 못하도록 했다. 사베인스-옥슬리법은 미국에서 회계부정을 막는데 큰 효과를 냈다. 분식회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회계부정이 중간에 적발돼 엔론처럼 대형 사건으로 커지지 않았다.

한국도 사베인스-옥슬리법을 참고해 2004년 증권거래법과 외감법(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 1997년 기아자동차(4조5000억원), 1999년 대우그룹(41조원)에 이어 2003년 SK글로벌(2조원) 등 대형 회계부정 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관련 법을 보완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분식회계가 사라지지 않았다. 모뉴엘(6000억원), 대우조선해양(3조원), 대우건설(3800억원) 등 대형 회계부정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베인스-옥슬리법의 일부를 도입했지만, 핵심 내용은 빠졌기 때문이다.

자산 2조원 이상인 상장회사는 사내 감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감사위원회가 기업 내부회계 감사를 제대로 하려면 감사위원회의 3분의 2를 구성하는 사외이사가 중립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사외이사 후보 추천위원회(사추위)에 CEO가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은 상장회사 65%의 사추위에 오너를 포함한 CEO가 참여하고 있다. 그 결과 CEO가 자신과 친한 인물을 사외이사로 선임하고, 그 사외이사로 구성된 감사위원회가 CEO의 경영활동을 기록한 회계장부를 감사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이러다 보니 대다수 한국 기업의 감사위원회는 분식회계를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회계부정을 지시한 CEO와 외부 회계감사를 담당한 회계법인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관대한 것도 문제다. 엔론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제프리 스킬링 CEO는 징역 24년 4개월 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반면 과거 대우그룹과 SK글로벌 등 대규모 분식회계를 저지른 국내 기업 CEO들은 수감된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특별사면 등으로 풀려났다. 회계부정을 못 본 체한 회계법인들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았다.

조선비즈가 6월23일 개최한 ‘2016 회계감사 콘퍼런스’에서 브루스 골드버그 PwC 파트너는 “한국에서는 기업의 대주주가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도 사면을 받아 짧게 형(刑)을 마치고 경영에 복귀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경제 범죄를 저지른 경영자는 회사에 복귀할 수 없도록 해야 국제적으로 믿을만한 투자처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분식회계의 폐해는 그 기업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우조선해양은 해외에서 선박과 해양플랜트를 원가 이하로 수주(受注)한 다음 회계장부를 조작해 수익이 난 것처럼 꾸몄다. 그 결과 해외 사업 입찰 과정에서 경쟁업체인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수주 기회를 빼앗아 결국 한국 조선업계 전체의 부실을 초래했다. 대규모 수익이 난 것처럼 조작된 대우조선해양의 회계보고서를 믿고 투자한 투자자와 대출을 해준 은행들은 큰 손해를 입었다. 최근엔 정부가 국민 혈세로 추가 편성한 예산을 차세대 산업기술 개발 대신 조선업계 구조조정에 투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한 기업의 회계부정이 관련 산업계와 자본시장은 물론 국가 경제 전체에 막대한 해악을 끼친 것이다.

20대 국회는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을 계기로 기업의 회계감사를 강화하는 법안 마련에 착수했다. 마침 공인회계사 출신 국회의원이 6명이나 당선돼 그 어느 때보다 제도 혁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관련 입법을 저지하려는 기업들의 로비 활동이 거세지고 있지만, 국회가 이번에는 제대로 된 회계감사법을 만들어, 회계부정을 근절하는 전기를 마련하길 기대한다.

호세 로드리게스 KPMG 감사위원회 지원센터 글로벌 리더는 2016 회계감사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기업의 분식회계는 담당 직원이 정직하지 않아서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CEO를 비롯한 회사의 압력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말했다. 조직적으로 범하는 회계부정을 막을 강력한 입법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