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술 산업 발전하면 농업, 지역경제 동반 성장한다"

<상편에서 계속> 대표적인 증류주인 위스키 제조에서 술 관련 일을 시작(그는 1980년 OB맥주에 입사한 뒤 일 년도 안돼 OB씨그램으로 옮기면서 위스키 제조 일을 시작했다)한 이종기 대표는 우리나라 최고의 증류주 전문가다. 그가 만든 위스키 종류를 꼽으라면 손가락 하나로는 모자란다. 블랙스톤, 썸싱 스페셜, 패스포트, 윈저, 골든블루 등등. 그는 2011년 오미자와인을 만들기 위해 문경에 양조장을 만들면서 포르투칼에서 1억5000만원을 들여 증류 시설을 수입해왔다. 외국산 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오미자 와인 개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그의 머리에는 오미자 증류주가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오미자 증류주는 1, 2차 발효-숙성을 거쳐 오미자와인을 만든 뒤 다시 3번 증류해서 만들어진다. 이종기 대표가 발효조에서 발효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6월 초 출시한 오미자 증류주 ‘고운달’ 제조공정을 이종기 대표와 함께 둘러보았다. “와인을 증류하면 브랜디(프랑스식 표현은 꼬냑)가 되듯이 오미자 와인을 세번 증류해서 오미자 증류주를 만듭니다. 그러면 무채색의 증류주가 나옵니다. 이 술을 오크통 혹은 항아리에서 3년 정도 숙성을 한 뒤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와 함께 둘러본 오미자 증류주 숙성고에는 크고 작은 오크통, 항아리들이 즐비했다.

이 대표는 “오크통 숙성 증류주라고 하더라도 주세법상 오크통 숙성을 일년 이상 하면 전통술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일년만 오크통에 넣고 나머지 2년 정도는 다시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킨다”고 말했다. 오크통 숙성 ‘골드 빛’ 증류주는 위스키를 겨냥한 것이고 항아리 숙성 무색 제품은 중국 바이주(백주)를 경쟁상품으로 염두에 둔 제품이다. 고운달 알코올 도수는 52도. 이 대표는 “언제나 아름다운 문경 밤하늘의 맑은 달을 연상시키려고 고운달이라 이름지었다"고 말했다.

오미자 와인을 오미자 증류주로 바꾸는 증류시설. 스테인레스 증류기를 사용하지 않고 위스키 설비와 같은 구리로 만든 증류기다.

그러면 오미자 증류주 맛은 어떨까? 전문가인 이종기 대표의 설명을 들어보자. “고운달 항아리 숙성 제품(무채색)은 달콤한 화이트 초콜릿, 과일, 허브 향이 나며 마시고 난 후에는 부드러운 목 넘김이 특징입니다. 오크통 숙성 제품(골드빛)은 오크통에서 우러나온 나무 향, 특히 삼나무 향이 나며 마시고 난 후에는 기분 좋은 쌉싸름함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고운달 가격은 절대 착하지 않다. 한병 값이 500mL 기준 30만원선. 아무리 오미자 가격이 비싸다 치더라도 너무 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표의 해명은 이랬다. “오미자 한 병에 오미자가 600g 들어갑니다. 그리고 오미자와인 5~6병을 증류시켜야 증류주 한 병이 나옵니다. 그런데 증류과정에서 일년에 원액의 5~10% 정도씩 증발돼 없어집니다. 고운 골드 빛과 향을 내기 위해 워낙 작은 오크통(25L)을 사용하다 보니 대용량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 일반 위스키 증발량(이를 ‘천사의 몫’이라고 한다)보다 3~5배 정도 많아 제조원가가 워낙 높습니다.”

하긴 위스키도 연산(숙성연도-에이징)이 20년, 30년 넘어가는 고급제품들은 20만원, 30만원으로 가격이 껑충 뛰지 않는가. 중국 유명 바이주도 비싼 것은 100만원이 넘는다는 그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어차피 많이 팔릴 것으로 기대하고 개발한 제품이 아닙니다. 다만, 세계 술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술로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오미자 증류주인 고운달 제품. 왼쪽이 항아리 숙성, 오른쪽은 오크통 숙성 제품으로 둘 다 500mL 기준 30만원선이다.

출발은 외국산 술로 시작했지만 그는 자신의 술 역정을 국산 재료로 만든 국산 전통술로 마무리하려 한다. 그 이유를 다시한번 물었다.

“직장생활 중 다행하게도 위스키, 브랜디, 진, 럼, 보드카, 리큐르, 소주 등 정말 다양한 증류주를 만들어 봤습니다. 또 한국, 동남아시장에서는 1~2위 하는 리딩 브랜드 제품도 여럿 만든 경험이 쌓였고요. 그러나 술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농업, 지역문화, 지역경제 등과의 연관성을 감안하면 한국 농산물에 기반을 둔 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어요. 만약 제가 만든 전통 술들이 잘 팔리면 원료를 재배하는 농가, 또 술을 만드는 지역은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프랑스가 세계적인 농업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데는 10만개가 넘는 와이너리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술은 개발했지만 요즘 그의 고민은 다른데 있다. 주세법상의 제약, 영세기업으로서 유통망 확장의 한계 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현재 오미나라가 판매하는 술의 70%는 양조장 방문 손님들이 사간다. 일부 백화점에도 납품하고 있지만 높은 마진 등으로 소비자들이 쉽게 고르지 못한다. 면세점 경우는 판매가격의 60%가 면세점측에서 수수료로 거둬간다. 이 대표는 “면세점 같은 경우는 외국인 마케팅 일환이지만 팔아봤자 남는 게 없다"며 “장기적인 안목에서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주세법도 그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출고가격에 세금을 매기는 현행 종가세는 고가 제품일수록 세금도 덩달아 오르는 구조여서 주류 업체들이 비싼 원료로 고품질 제품을 내놓으려는 의지 자체를 처음부터 꺾는 악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주류 정책이 술 산업의 발전이 아니라 안정적인 세수 확보에 있다는 지적이다. 이 대표는 “외국처럼 우리도 술 양에 세금을 매기는 종량세로 전환하면 오미로제뿐 아니라 대부분의 전통술 가격을 최소한 30~40%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증류를 끝낸 오미자 원액은 항아리나 오크통에 담아 3년 이상 숙성 시킨 뒤 세상에 내보낸다. 이종기 대표가 증류주 숙성고에서 술이 든 항아리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에 계속 계란만 던진다고 능사가 아니다. 최근 증류주 개발을 마무리한 이 대표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제조공법을 바꾸어 현재 9만원대인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값을 5만원대로 낮추는 프로젝트다. 오미자 스파클링 발효에 탱크 방식을 도입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스파클링 와인은 일반적으로 1차 발효를 스테인레스통에서 한 뒤 병에 하나하나 담아 2차 발효를 하는데, ‘2차 병 발효’ 대신 1차 발효처럼 2차 발효도 스테인레스 발효조에서 할 수 있다면 생산단가를 획기적으로 줄여 판매 가격을 30~40% 낮출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또다른 바램이 있다. 오미자 와인처럼 국산 재료로 새로운 전통 술을 만드는 경우는 정부가 ‘소기업 고유업종’으로 지정해 대기업들이 넘보는 일이 없도록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문경 일대 22개 농가와 계약을 맺어 무농약 유기농 오미자를 kg당 1만2000원에 구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산을 쓸 경우 재료 값을 4분의 1까지 떨어뜨릴 수 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오미자 와인이 사업이 된다’ 판단될 때 대기업이 중국산 오미자 와인을 저가에 내놓더라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어렵게 시장을 개척해 결국 대기업만 좋은 일 시키는 셈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오미나라의 미래를 그리 낙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좋은 술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야 저 혼자만 느끼는 것이고, 아무리 좋은 뜻으로 출발한 기업이더라도 결국 지속경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농업의 부가가치를 가장 높일 수 있는 아이템이 술입니다. 프랑스, 일본, 중국을 보세요. 전통 술 육성은 결국 우리 농촌과 지역 경제를 살리는 길입니다.” 세계적인 한국 명품주를 만들고 나아가 우리 농가에도 기여하겠다는 이 대표의 꿈이 더욱 커지고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