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섬나라 피지의 퀠리쿠로 주민들은 집 대신 텐트에서 살고 있다. 지난 2월 사이클론 '윈스톤'의 영향으로 집이 모두 무너졌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인근 강물을 떠다 마시고 있지만, 오염된 물이어서 장티푸스 등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이 마을에 지난 4일 한국에서 선물이 도착했다. 광주과학기술원(GIST) 환경공학부 김영웅·이윤호 교수 연구팀이 마을에 전원(電源)이 필요없는 정수기를 3대 설치해 준 것이다.

손 씻도록 유도하는 크레용 비누

GIST 연구팀은 2013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의 요청으로 무전원 정수기를 만들어왔다. WHO는 특별한 유지 보수 없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수기여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연구팀은 미세한 구멍이 무수히 많이 뚫려 있는 고분자 막(膜)인 '멤브레인(Membrane)'을 중앙에 설치한, 통 모양의 정수기를 만들었다. 위에서 물을 부으면 멤브레인을 거쳐 정수가 된다. 특별한 장치 대신 중력이라는 자연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지난 4일 광주과학기술원 환경공학부 연구팀이 피지 퀠리쿠로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전원이 필요 없는 정수기를 선물하고 있다(위). 아래 사진은 김우식·최덕수 디자이너가 만든‘행복한 대야’로 아프리카 여성이 정수하는 모습.

시험 결과 멤브레인은 대장균 등의 병원균과 이물질을 99.9% 이상 걸러낼 수 있었다. 또 멤브레인 위에 남아있는 미생물이나 박테리아가 이물질을 분해해 별도의 청소도 필요 없어 유지보수가 쉽다는 점도 확인했다. 김경웅 교수는 "정수기 한 대에서 시간당 2~10리터(L)의 안전한 물을 얻을 수 있다"면서 "조그만 마을의 식수로는 충분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저개발 국가의 열악한 환경에 맞게 개발된 기술이나 기기를 '적정기술'이라고 한다. GIST 연구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최근 적정기술 분야에서 한국 과학자와 기업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 네팔, 동남아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찾아나서 아낌없는 도움을 주고 있다.

산업디자이너인 김우식·최덕수씨는 아프리카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복한 대야'를 만들었다. 초록색의 모자 형태인 대야는 아랫부분에 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연못이나 강물에 이 대야를 올려놓고 누르면 이 구멍을 통해 깨끗한 물만 걸러져 대야 안으로 들어온다. 한번 들어온 물은 다시 나가지 않도록 설계돼 있다. 대야 날개 부분에 공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물이 가득 차도 가라앉지 않는다. 서울디자인올림픽에서 철해치상을 받았다.

산업디자이너 변준호씨는 인도 동료들과 함께 만든 비누 '소아펜(SoaPen)'으로 지난해 유니세프가 주최한 '웨어러블 포 굿(좋은 착용 제품)' 공모전에서 우승했다. 소아펜은 크레용처럼 손바닥 등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비누이다. 아이들의 손에 소아펜으로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주고, 그림을 완벽히 지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손 씻는 방법을 터득한다.

백신 보급 위한 오토바이 냉장고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안성훈 교수는 에너지 분야에 집중한 적정기술을 개발 중이다. 2011년부터 네팔에 소형 발전소를 짓고 있다. 산악지대가 많은 네팔의 조그마한 마을들은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안 교수는 방학 때마다 학생들과 네팔에서 태양광과 소수력(물의 높낮이를 이용한 소규모 수력발전) 발전소를 짓는다. 각 마을에 최적화된 구조의 발전소를 짓는 것이 핵심이다. 현재까지 4곳의 마을에 발전소를 지었고, 이를 통해 2000여명의 주민에게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안 교수가 몸담고 있는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는 백신을 오지까지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하고 있다. 백신은 섭씨 2~8도를 유지해야 효과가 있다. 하지만 산간이나 도서 지역 등에서는 곳곳에 퍼져 있는 마을까지 백신을 전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안 교수 연구팀은 배달용 오토바이의 전원을 사용하는 소형 냉장고를 제작해 공급했다. 냉장고에는 온도계와 위치추적 장치도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