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초고성능 컴퓨터 활용 및 육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의 법률이 있다. ‘수퍼컴퓨터 육성법’으로 불리며 2011년에 제정됐다. ‘국가는 국가초고성능컴퓨팅의 육성을 위하여 필요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수퍼컴퓨터 개발·육성·관리를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두 번째로 관련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법안에 근거해 정부는 2017년까지 세계 7대 수퍼컴퓨팅 강국으로 진입한다는 청사진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목표연도가 1년 남은 현재 세계 7대 강국의 비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수퍼컴퓨터 육성법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법률 제정 이후 한국의 수퍼컴퓨터 개발 역량은 오히려 후퇴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예산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것을 비롯해 거의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올들어 ‘알파고’ 충격 이후 정부가 또다시 수퍼컴퓨터 개발 계획을 내놨다. 매년 100억원씩 투입해 2020년까지 1페타플롭스 이상, 2025년까지 30페타플롭스 이상의 수퍼컴퓨터를 만들겠다고 했다. 1페타플롭스는 1초에 1000조번의 부동소수점 연산이 가능한 처리속도를 가리킨다.

2020년 또는 2025년에 그 정도 성능으로 수퍼컴퓨터 행세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중국이 자체개발한 세계 1위 수퍼컴퓨터 ‘선웨이 타이후라이트’의 성능은 93페타플롭스다. 중국은 2020년 엑사플롭스(1초에 100경회의 연산 처리 속도) 컴퓨터 개발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한국이 개발하겠다고 한 1페타플롭스 컴퓨터의 1000배다.

중국과 비교하면 낯 뜨거운 수준이지만 그나마 제대로 추진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수퍼컴퓨터 개발의 목표와 방법이 분명치 않다. 알파고 화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분위기에 편승해 즉흥적으로 프로젝트를 만든 탓에 방향을 못잡고 우왕좌왕하는 인상이다.

중국은 수퍼컴퓨터 개발을 위해 20년 이상 꾸준히 투자하며 역량을 키웠다. 2003년에 이미 세계 51위 수퍼컴퓨터를 내놓았고 2010년에는 드디어 세계 1위에 올라섰다. 다만 미국에서 수입한 CPU(중앙처리장치)칩을 사용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미국보다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체 개발한 CPU로 세계 최고 성능의 수퍼컴퓨터를 내놓았다. 성공을 장담하기 힘든 상황에서 자체 프로세서 개발을 위한 연구소를 여러 개 설립하며 오랫동안 투자하고 노력한 결실이다. 중국의 수퍼컴퓨터 개발에 제동을 걸기 위해 CPU 수출을 금지한 미국 정부만 머쓱해졌다.

국내에서도 1980년대부터 국산 서버(server)와 수퍼컴퓨터 개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성능이 떨어지지만 독자 개발한 수퍼컴퓨터도 여럿 있다. 하지만 지속적인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단발 프로젝트로 끝나고 말았다.

삼성전자가 1990년대 후반 미국 디지털이큅먼트(DEC)와 손잡고 세계 최고 성능의 CPU를 개발, 생산했지만 인텔의 견제로 결국 좌초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이 자체 개발한 CPU는 바로 그 DEC의 알파칩 기술을 응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퍼컴퓨터만이 아니라 한국형 우주발사체, 지능형 로봇, 배아줄기세포, 나노이미지센서 등 정부 주도 연구개발 사업들이 대부분 사정이 비슷하다. 시작은 창대해도 끝은 초라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오지랖 넓게 벌인 일은 많지만 제대로 결실을 맺는 것은 드물다. ‘정부 주도’가 문제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사회적 이슈나 권력자의 관심사에 맞춰 재빨리 육성책을 내놓지만 허울 좋은 구호로 끝나기 일쑤다. ‘세계 몇 대 강국’같은 거창한 목표만 있을 뿐 실행 방안이 엉성하고 끈기가 부족하다. 정권이 바뀌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아 연구개발 투자를 많이 하면서도 성과가 나지 않고 축적되는 것도 없다.

서울대 의대 호원경 교수는 최근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국가 연구비 지원시스템이 오히려 과학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기획 과제 중심의 연구비 지원이 연구자들의 창의성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호 교수는 “기획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 타당성이 아니라 정부 관료를 설득할 수 있는 정치력”이라고 했다. “젊은 연구자들은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고 구현하기 위해 고민하기 보다 정치력 있는 연구자가 만들어 놓은 기획 과제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도 했다.

‘스웨덴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다. 적극적인 연구개발 투자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기업 수익 향상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은 지금 ‘코리아 패러독스’에 빠져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과학 경쟁력은 제자리 걸음이다. 헛돈 쓰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국책 연구 과제 선정과 연구비 지원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정치력이 아니라 동료 과학자들의 평가(peer review)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도록 하는 게 해결책이다. 정권의 업적 과시를 위한 과학 연구는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