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선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이 대기업집단지정 기준을 자산 '5조원 이상'에서 '10조원 이상'으로 올리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혁신을 계속 하라는 뜻에서 규제를 풀어준 것 아닐까요."

9일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이 자산 5조원 이상에서 10조원 이상으로 완화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IT 기업 카카오는 한껏 고무된 분위기였다. 자산 5조830억원인 카카오는 지난 4월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서 갑자기 손발이 묶였다. 자산 1위 삼성그룹(348조2260억원)의 70분의 1에 불과한 규모지만 같은 수위의 규제를 받게 됐다. 카카오의 한 간부는 "대기업으로 지정되면서 계열사들이 벤처캐피털 투자를 받을 수 없게 됐고, 소프트웨어나 지능형 로봇 업종에 진출이 제한됐다"며 "이번 규제 완화로 향후 사업 추진에 탄력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정부가 대기업집단 기준을 완화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정 기준이 8년째 유지되면서 규제 대상 기업이 대폭 늘어났고, 그 결과 투자 활동에 애로를 호소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대기업집단에 편입되지 않기 위해 투자 확대와 사업 재편을 기피하는 피터팬 증후군(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병리현상)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규제 완화의 취지를 설명했다. 재계는 즉각 기대감을 표시했다. 특히 대기업집단에서 풀려나는 재계 30~60위권 기업들이 상당한 수혜를 입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8년째 그대로인 대기업 기준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는 일부 재벌 그룹에 집중된 경제력이 과도하게 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1987년부터 시행 중이다. 대기업집단이 되면 공정거래법에 따라 계열사끼리 맞교환식 출자를 할 수 없고, 서로 빚 보증을 설 수도 없다. 이외에도 중소기업 범위에서 제외돼 각종 혜택을 받지 못하고, 벤처투자조합으로부터 투자도 못 받는 등 모두 38가지 법령에 근거해 투자 활동에 제약이 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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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이 2008년 자산 5조원 이상으로 결정된 이후 8년간 변하지 않으면서 시대 변화에 맞지 않는 규제가 됐다는 점이다. 8년 사이 국내총생산(GDP)은 50% 가까이 커졌다. 대기업집단 내 상위·하위 집단 간 자산 규모 격차도 갈수록 벌어졌다. 그래서 "현실감 떨어지는 여름철 겨울코트"라는 비판이 나왔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가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개정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KCC·KT&G·코오롱 등 대기업 제외

대기업집단이 현재 65개에서 28개로 줄어들면 자산 10조원 미만인 KCC, KT&G, 한국타이어, 코오롱, 교보생명보험 등이 대거 대기업집단에서 빠진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정부의 규제 완화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이번에 규제가 풀리는 대기업들이 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에 앞장설 것"이라며 환영 의사를 밝혔다.

카카오는 추진 중인 인터넷은행 사업이 순항할 가능성이 커졌다. 적어도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인터넷은행의 지분율을 제한받을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셀트리온 역시 갑자기 법인세 부담이 늘어날 위험에서 벗어나게 됐다.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이 될 경우 연구개발(R&D) 세액공제 비율이 대폭 축소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정부는 대기업 기준을 올린 것과 발맞춰 지주회사가 될 수 있는 자산 요건도 9월부터 현행 1000억원에서 5000억원으로 올리기로 했다.

◇대기업서 풀려나도 바로 혜택 못 누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 규제 완화에 반대한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날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은 현행 5조원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번 규제 완화로 37개 대기업집단과 618개 계열사가 규제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경제력 집중이 심각해지고 골목상권 침해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중소기업, 소상공인 등이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공정위는 "8월 말까지 중견기업법 시행령을 개정해 대기업집단에서 제외된 중견기업이 기존의 중견기업 지원 정책 대상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