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이 선택한 날개 없는 선풍기’

영국 가전업체 ‘다이슨(Dyson)’에 따라붙는 표현이다. 2010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날개 없는 선풍기 ‘다이슨 쿨(Dyson cool)’ 사진을 올렸다. 정 부회장은 “오랜만에 물건 다운 물건을 구한 것 같다. 너무 좋다”고 호평했다. 이 제품은 순식간에 명성을 얻게 됐다. 날개가 없는 선풍기의 모습에 사람들은 ‘신기하다’, ‘놀랍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이슨 쿨 선풍기(왼쪽)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다이슨 쿨은 다이슨의 창업자인 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다이슨은 선풍기 날개에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우려감과 날개를 분리해야 청소할 수 있다는 불편함에 주목했다.

다이슨은 2007년 날개가 없는 선풍기를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실무진에 전달했다. 3년 뒤 2009년 세상에 없던 ‘날개 없는 선풍기’가 탄생했다. ‘일상의 문제를 기술로 해결한다’는 다이슨의 기업철학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다이슨 쿨은 출시되자 마자 디자인은 물론 기능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일반 선풍기보다 시원한 바람을 내뿜었기 때문이다. 다이슨 쿨의 가격이 일반 선풍기보다 20~30배 비싼데도 불티나게 팔린 것은 이 때문이다. 다이슨 쿨 국내 판매 가격은 54만8000원~74만8000원이다.

일반 선풍기(왼쪽)와 다이슨 쿨의 모습

◆ ‘날개 없는 선풍기’ 다이슨, 127년 된 선풍기 상식 바꿨다

다이슨 쿨은 선풍기에 대한 일반 상식을 완전히 뒤엎었다. 1883년 등장한 선풍기는 바람개비 모양의 날개가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바람을 앞으로 쏘아주는 제품이다. 그런데 다이슨 쿨은 적어도 겉모양상으로는 바람을 일으킬 날개가 없다. 다이슨 쿨이 전시된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보면 바람이 어디서 나오는지 제품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만져보는 소비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① 다이슨 쿨 선풍기에는 날개가 진짜 없다?

다이슨 쿨에는 정말로 바람을 일으키는 날개가 없을까? 다이슨 쿨에도 날개는 있다는 게 정답이다. 성능이 더 좋은 날개가 숨어있다.

다이슨 쿨 아래쪽 원통형 기둥 안에는 나선형 모양의 회전 날개가 들어있다. 원통형 기둥에는 지름 1mm 크기의 공기구멍 수십개가 뚫려있다. 이 곳을 통해 외부의 공기가 유입된다. 나선형 모양의 날개는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공기 구멍을 통해 공기를 빨아들인 뒤 기둥 상층의 원형 고리 부분에 바람을 세게 밀어 넣는다.

날개 없는 선풍기 다이슨 쿨 제품의 기능 설명

‘에어 멀티플라이어(Air Multiplier)’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다이슨의 특허 기술이다. 이 기술은 공기 흐름의 속도를 몇 십배 더 빠르게 한다. 에어 멀티플라이어는 엔진의 폭발력을 높이기 위해 회전 날개로 외부에서 공기를 끌어들이는 비행기의 제트엔진, 자동차의 터보차저 엔진의 동작을 응용했다.

예를 들어 비행기의 양쪽 날개에 부착된 제트 엔진에는 공기를 빨아들이는 스크루 날개가 장착돼 있다. 제트엔진은 공기를 엔진 내부로 빨아들인 뒤 분사된 연료를 폭발시켜 고온의 기체를 엔진 뒤쪽으로 배출한다. 이 기체는 비행기의 추진력이 된다. 에어 멀티플라이어는 엔진처럼 폭발은 없지만 날개의 회전으로 공기를 빨아들여 배출한다는 점에서 제트엔진과 비슷하다.

에어 멀티플라이어가 1초당 빨아들이는 공기의 양은 약 27리터(L)로 일반 선풍기의 3배 수준이다. 일반 선풍기가 날개를 통해 뒤쪽에서 빨아들이는 공기의 양은 10L 정도다.

베르누이 초상화

② 비행기 이륙 원리 응용…공기속도 15배 증폭

다이슨 쿨에는 유체역학(流體力學)의 하나인 ‘베르누이의 원리(Bernoulli principle)’도 적용됐다. 유체역학은 공기나 물처럼 흐를 수 있는 유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1700년대 스위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 베르누이는 유체가 좁은 곳을 통과할 때 속력이 빨라지고 압력은 감소하는 반면 넓은 곳을 통과할 때에는 속력이 느려져 압력이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베르누이 원리가 적용되는 대표적인 사례는 비행기 날개다. 보통 비행기 날개의 윗부분은 볼록한 타원형, 아랫부분은 평면으로 디자인됐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속도를 낼 때 공기는 비행기의 날개에 부딪히게 된다. 이때 날개를 사이에 두고 갈라지는 위·아래 공기 중 날개 위쪽 공기의 속도가 아래쪽보다 빠르다.

베르누이의 원리에 따라 볼록한 날개 위쪽에서는 공기가 좁은 곳을 통과하기 때문에 공기의 속도가 빠르고 압력은 낮다. 반대로 공기가 대부분 그대로 통과할 수 있는 아래쪽은 공기의 속도가 느린 대신 압력이 더 강하다. 비행기가 고속으로 주행하면 날개 위쪽보다 아래쪽 압력이 강해지면서 양력(揚力)을 얻어 이륙할 수 있게 된다.

다이슨 쿨의 원형 테두리 내부에 있는 비행기 날개 단면 모양의 좁은 공간은 공기의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다이슨 쿨은 크게 상단 원형 테두리와 하단 원통 기둥으로 나뉜다. 원형 테두리 내부에는 비행기 날개 단면과 비슷한 모양의 공간(에어호일)이 있으며 외부에는 원을 따라 너비 1.3mm의 공기 배출구가 이어져 있다.

에어 멀티플라이어 날개가 고속 회전하면서 상층으로 밀어낸 공기는 좁은 에어호일을 따라 이동하면서 가속도가 붙게 된다. 속도가 빨라진 바람이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바람의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물이 통과하는 호스를 손으로 누르면 물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이슨 쿨은 공기 흡입 속도보다 15배 빠르게 외부로 바람을 내뿜는다.

일반 선풍기(위)와 다이슨 쿨(아래)의 바람세기, 직진성 차이

다이슨 쿨이 일반 선풍기보다 시원한 바람을 보내는 이유는 바람의 양이 많은 데다 바람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 직진성이 좋기 때문이다. 일반 선풍기의 경우 날개가 오히려 공기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날개가 회전해 바람을 일으킬 때 날개와 날개 사이 빈 공간에서도 바람이 끊기는 현상이 발생한다.

③ 공명(共鳴)으로 발생한 소음은 공명으로 잡는다

2009년 다이슨 쿨이 등장했을 때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소음’이 문제였다. 다이슨은 소음을 잡기 위해 엔지니어와 과학자로 팀을 꾸려 4년간 연구개발에 나섰다. 연구팀은 먼저 소음의 진원지부터 찾았다. 주범은 에어 멀티플라이어였다. 공기를 빨아들여 상층까지 보내주는 에어 멀티플라이어의 날개와 모터에서 소음이 발생했다.

원통 기둥의 공기 구멍 주변에서는 모기 날갯 소리와 비슷한 1000Hz 주파수 대역의 거슬리는 고음도 났다. 작은 구멍으로 공기가 흡입되면서 나는 소음이었다.

다이슨 쿨 선풍기 소음 제거 기술인 헬름홀츠 캐비티 소개

다이슨 연구진은 소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4년 출시한 2세대 모델에 특허 기술 ‘헬름홀츠 캐비티(구멍)’를 적용했다. 이 기술은 19세기 과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가 밝힌 ‘헬름홀츠 공명’ 현상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헬름홀츠 공명이란 빈 병 꼭지에 바람을 불어넣었을 때 공기가 진동하면서 소리가 울리는 현상으로, 특정 주파수 음이 증폭되는 것을 말한다. 반면 헬름홀츠 캐비티는 특수하게 설계된 구멍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면서 음파가 그 안에 갇혀 소멸된다. 이를 통해 2세대 모델은 이전 모델 대비 소음을 최대 75% 줄였다.

◆ 다이슨, 경쟁력의 열쇠는 ‘특허’…中 짝퉁 문제는 골치

다이슨은 바람을 더 멀리 강하게 내뿜을 수 있는 날개 없는 선풍기 기술을 응용해 냉·온풍기, 공기청정기, 가습기, 헤어드라이기 시장에도 진출했다. 이들 제품의 디자인은 모두 똑같다. 원통형 기둥에 원형 테두리 모양의 바람 배출구가 있는 식이다.

다이슨 관계자는 “선풍기, 냉·온풍기, 공기청정기, 가습기 등 공기의 흐름을 이용하는 제품에 날개 없는 선풍기 기술을 적용했다”며 “이 기술은 바람을 강하게 멀리까지 보낼 수 있어 다른 회사 제품에 비해 더 빠른 시간내 집 안 공기를 순환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이슨 제품군의 모습(우), 다이슨 RDD 연구소 연구원들이 청소기 디자인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아래)

다이슨의 특허기술은 대부분 사내 연구소인 ‘RDD(Research Design and Development)’ 센터에서 개발된다. 이 연구소는 기계공학, 유체공학, 화학, 전기공학을 비롯해 미생물학, 음향공학, 소프트웨어 공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로 구성됐다. 다이슨은 이 연구소에 주당 300만 파운드(약 52억4000만원), 연간 1억5600만 파운드(약 273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한다. 다이슨은 공기 흐름을 제어하는 기술 특허만 약 3000개 보유하고 있다.

또 다이슨은 차세대 엔지니어 양성과 테크놀로지 리더 발굴을 위해 명문 대학인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CL)에 ‘다이슨 디자인 엔지니어링 스쿨(The Dyson School of Design Engineering)’ 과정을 만들었다.

중국 길거리에서 판매되고 있는 다이슨 쿨 선풍기의 짝퉁 제품 모습

최근 다이슨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중국산 짝퉁 제품과의 전쟁을 선포한 상태다. 2012년에는 중국산 짝퉁 제품을 수입해 국내에 판매한 소형 유통업체들에 경고장을 보내기도 했다.

다이슨은 2013년에 삼성전자가 영국에 출시한 청소기 ‘모션싱크’의 기술이 자사의 싸이클론 특허 기술을 침해했다며 영국고등특허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싸이클론은 원심력을 이용해 공기와 먼지를 분리해 필터의 막힘과 청소기의 흡입력을 오랫동안 유지해주는 기술이다. 다이슨은 2013년 11월 특허침해 소송을 자진 취하했으나 삼성전자는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다이슨을 제소했다. 두 회사의 소송전은 3년간 이어진 끝에 서로의 특허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올해 4월 종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