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中東)이라는 낯선 환경은 걱정이지만, 최고의 수퍼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분야에 수퍼컴퓨터를 활용해 본 뒤 돌아와 다시 한국 기술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이지수(54)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박사는 올 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중동의 MIT'로 불리는 킹압둘라과학기술대(KAUST)에 수퍼컴퓨터 센터장으로 와 달라는 스카우트 제의였다. 추천인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석좌교수이자 KAUST 부총장인 장 브레쳇 교수였다. 종신직 센터장과 현재 연봉의 3배 이상, 고급 주택과 무제한 보험을 제공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 박사는 출국을 하루 앞둔 26일 "대우보다는 수퍼컴퓨터 활용에 대한 전권을 준다는 제안이 더 매력적이었다"면서 "같이 일할 사람들을 뽑을 권한도 받았다"고 말했다.

이지수 박사가 대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수퍼컴퓨터‘타키온Ⅱ’앞에 섰다. 그는 다음 달 사우디아라비아 킹압둘라과학기술대(KAUST) 수퍼컴퓨터 센터장으로 부임한다. 이 박사는“사우디에서 경험을 쌓은 뒤 다시 돌아와 한국 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우디 킹압둘라과학기술대에 구축돼 있는 세계 7위의 수퍼컴퓨터 사힌Ⅱ.

KAUST가 도입한 수퍼컴퓨터 '사힌Ⅱ'는 지난해 기준으로 계산 속도에서 세계 7위의 성능을 자랑한다. 한국 최고인 기상청의 '누리'(세계 29위)보다 3배나 빠르다. 사힌Ⅱ보다 더 좋은 장비를 보유한 나라는 중국·미국·일본·스위스 등 4개국뿐이다. 제품 가격과 설치 비용, 각종 주변 부품과 운용 인력 등을 포함하면 3000억원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박사는 "KAUST는 좋은 장비를 갖고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서 "직접 수퍼컴퓨터 센터를 구축하고 운용해본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추천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아시아권 최고의 수퍼컴퓨터 전문가로 꼽힌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에서 전산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울리히 수퍼컴퓨터 센터, 뉴욕대 수퍼컴퓨터 센터에 초창기부터 참여했다. 2003년 귀국해 작년까지 KISTI 수퍼컴퓨터 센터장을 맡았다. 2010년 세계 순위 24위까지 올랐던 수퍼컴퓨터 '타키온Ⅱ' 구축이 대표적 업적이다.

이 박사는 "KAUST의 역할은 인근에 위치한 '킹압둘라 경제도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퍼컴퓨터 기술을 개발해, 도시를 중동의 실리콘밸리로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KAUST는 사우다아라비아가 국가의 미래를 걸고 2009년 설립했다. 킹 압둘라 전 국왕이 "석유 산업 이후를 대비할 과학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면서 사재(私財) 5조원을 내놨다. 매년 연구비로만 2조원 가까이 투자한다. 남녀 분리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우디 유일의 남녀공학 대학이기도 하다. 이 대학은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을 영입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 전 총장인 장 루 샤모가 총장을 맡는 등 150명의 교수 대부분이 세계적인 석학이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가 수퍼컴퓨터 분야에서 앞서가려면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는 아직도 '비싼 걸 샀는데, 전원만 꽂으면 알아서 돌아가는 거 아니냐'는 인식이 있다"며 "수퍼컴퓨터는 같은 기계, 같은 프로그램으로 돌리더라도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장비만 중요하게 여기지, 이를 운용하는 사람을 키우는 정책은 부족하다는 말이다.

기업들도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나 독일의 자동차 회사는 대부분의 충돌 시험을 수퍼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실물 충돌 시험에 많은 비용을 쓴다는 지적이다. 수퍼컴퓨터를 활용하며 혁신 기술을 축적하기보다는 기존 방식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사우디에서 수퍼컴퓨터를 산업에 적용하다 보면, 한국에 필요한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종신직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