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마유 등 동물성 크림은 잔인하다는 인식 때문에 美 시장에 적절치 않아
목욕탕에서 우유를 바르는 한국 문화적 스토리에 소비자들 흥미 느껴

사라 리(왼쪽)과 크리스틴 장 글로우 레시피 공동 창업자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미국 ABC 방송의 투자 유치 오디션 ‘샤크 탱크’에 출연해 투자 유치까지 성공한 두 명의 공동 창업자가 있다. 사업 아이템은 다름 아닌 한국 화장품. 글로벌 브랜드인 로레알에서 이사 지위까지 올랐던 뷰티 업계 베테랑들이 한국 화장품의 우수성을 미국에 알리겠다며 시작한 글로우 레시피(Glow Recipe)란 회사다. 방송 중 투자자들은 젤리 같은 제형을 지닌 한국 화장품을 발라보며 관심을 보였고, 이 신생 기업이 미국 K-뷰티 열풍을 이끌 것이라며 투자를 결정했다.

로레알 미국 지사에서 키엘, 랑콤 등 유명 브랜드를 책임져온 한국인 사라 리(Sarah Lee)와 크리스틴 장(Christine Chang)은 회사를 나와 2014년 뉴욕에서 K-뷰티 스타트업을 차렸다. 사라 리는 로레알 코리아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해 뉴욕 지사로 발령 난 첫 한국인이다. 그들은 뉴욕에서 일하던 중 미국 본사 직원 8000명 중 미국과 한국 뷰티 시장에서 모두 경력이 있는 사람이 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 화장품의 현지화를 돕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화장품을 파는 것뿐 아니라 최근 LG생활건강 브랜드 ‘빌리프’의 미국 진출을 도왔다.

미국 최대 화장품 유통업체인 세포라에 입점한 '빌리프’

글로우 레시피는 앞으로 미국 화장품 시장에서 한국 화장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들은 대기업보다는 제품력이 우수한 중소기업에 더 큰 관심을 보였으며, 미국 시장 진출을 꿈꾸는 한국 화장품 기업에 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갖추고 ② 한국의 스토리를 담고 ③ 제품의 가벼운 사용감을 추구하라고 조언했다.

-글로벌 기업의 이사의 직위를 버리기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됐나요?

“로레알에서 근무할 때 K-뷰티 관련 리서치를 통해 한국 화장품에 대해 많이 알게 됐습니다. 글로벌 브랜드도 한국 화장품을 연구해 신제품의 영감으로 삼을 정도로 한국 제품의 기술은 대단합니다. BB크림, 시트 마스크, 쿠션 팩트 등은 모두 한국에서 탄생한 화장품이지만, 이제 모든 글로벌 브랜드가 따라서 생산하고 있죠. 한국에서 스킨케어 제품을 사오면 연구원들이 모여서 사용해볼 정도입니다. 한국 화장품이 미국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확신이 생겨 저희도 자신감을 가지고 로레알을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로레알에서 10년 넘게 근무하셨으니 뷰티 업계에 대해 상당히 잘 아시겠습니다.

“K-뷰티에 대해 알아보던 도중 미국에서 한국 화장품을 판매하는 회사 중 미국과 한국의 화장품 관련 경험을 모두 가진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화장품은 단순히 수입해서 판매하는 상품이 아닙니다. 로레알 프랑스 본사에서도 미국에 제품을 내놓을 때는 미국 소비자에 맞춰서 오랜 기간 현지화 전략을 세운 뒤 출시합니다. 같은 서양인이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고객의 제품 이해도, 취향, 니즈는 많이 다릅니다. 또 새로운 형태의 제품을 내놓을 때는 어떻게 사용할지 교육을 해야 하죠. 한국 제품을 미국에 내놓는다면 현지 뷰티 시장을 잘 분석해서 적절한 현지화 전략을 내놓아야 합니다.”

미국 인기 방송 ‘샤크 탱크’에 출연한 글로우 레시피 공동 대표

-예를 들자면요?

“가장 기본이지만, 여전히 어려운 부분인데 바로 ‘언어’입니다. 예컨대, 바르면 10분 내로 굳어 손쉽게 떼어낼 수 있는 한국 모델링팩을 직역해서 ‘modeling pack’이라고 표기한다면, 어떤 미국인도 무슨 제품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팩’이라는 표현이 없어요. 얼굴에 바르고 닦아내거나 떼어내는 제품은 ‘마스크(mask)’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저희는 모델링팩을 ‘러버 마스크(rubber mask)’라고 표기했어요. 고무처럼 말랑 말랑해진 상태에서 떼어낸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또 패팅워터팩이라는 제품이 있는데, 물에 소량을 타서 얼굴에 패팅하듯이 세안해주는 제품이에요. 이 제품의 경우 패팅이라는 단어가 와 닿지 않아서, 물을 튀기다는 뜻의 ‘스플래시 마스크(splash mask)’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제품 고유의 의미를 해치지 않되 미국 소비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콘셉트로 현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소비자들은 한국 화장품의 어떤 점을 좋아하나요?

“많은 사람이 한국 제품의 귀여운 패키지, 저렴한 가격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저희는 한국 고유의 문화가 깃든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는 우수한 제품을 만들기에만 바쁘지만, 미국 소비자들은 생각보다 제품 뒤에 담긴 철학과 역사,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저희 대표 상품 중 하나인 블라이드의 패팅워터팩은 목욕탕에서 우유 혹은 녹차를 얼굴과 온몸에 바르고 씻어내는 어머님들의 세안법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에 이런 미용 문화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서양인들은 매우 흥미로워해요. 실제로 사용해보니 효과도 좋기 때문에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글로우 레시피 홈페이지

-미국에서 한국 화장품을 알리는데 힘든 점은 없나요?

“지금 K-뷰티에 대한 이미지를 미국에서 구축해 나가는 시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습니다. 소비자들에게 어떤 첫인상으로 각인되느냐에 따라 더 큰 트렌드로 확산될 수도 있고, 외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과거 한 미국 매체는 한국 여성의 스킨케어 루틴으로 10개 이상의 스킨 케어 제품을 사용한다고 소개했는데, 기사의 헤드라인으로는 좋았지만, 한국 화장품에 대한 벽이 생겼어요.

세포라에서 일하는 판촉 직원들도 한국 화장품은 복잡하고 어려워서 설명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미국의 소비자는 정말 합리적이고 간편한 제품을 원합니다. 여러 개의 제품 순서를 기억하고, 시간을 들여 바르는 방식을 내세우는 건 장기적으로 많은 소비자층을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봅니다.

아울러 달팽이 크림, 마유 크림 등의 제품도 미국 시장에서는 적절치 않습니다. 동물 보호를 중요시하는 미국 소비자에게 잔인한 상품으로 간주되거든요. 처음 호기심으로 몇 명의 소비자들이 구매할 수는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트렌드를 이어가긴 어렵습니다.”

-까다로운 심사 기준을 적용해 한국 화장품을 선발한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한국의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브랜드를 발굴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뷰티 업계 지인들에게 추천을 받고, 직접 화장품 회사 관계자를 만나 가능성 있는 브랜드를 찾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합니다. 가장 눈여겨보는 부분 중 하나는 브랜드 철학입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회사인지, 제품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꼼꼼히 보는 편이죠. 제품력도 중요하고요.”

블라이드의 프레스드 세럼

-화장품의 제품이 좋다는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요?

“사용감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껍게 여러 겹을 바르는 제품은 요즘 추세가 아닙니다. 가벼운 질감으로 바른 듯 안 바른듯 산뜻한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저희 제품 중 블라이드의 ‘프레스드 세럼’이 인기인데, 이 제품은 세럼과 크림을 혼합했기 때문에, 하나만 발라도 두 가지의 제품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미국은 아무래도 인종이 다양하기 때문에 되도록 여러 피부에도 안전하고 효과적인 사용이 가능한 제품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흑인, 백인, 황인 등 피부 타입이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테스트 팀을 만들어서 제품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디자인도 미국 시장에 맞는 패키징이 중요하고, 그런 부분이 부족할 경우에는 같이 상의하면서 바꿔 나가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글로우 레시피의 앞으로 목표는 무엇인가요?

“현재는 K-뷰티가 우수하다는 것을 더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그다음 단계로는 많은 미국인이 실제로 한국 화장품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확실한 효과와 성분을 가진 제품들을 발견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계속해서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