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주커버그의 옷장엔 검은색, 회색 옷만 가득
아침에 뭘 입을까 고민하기 귀찮아, 똑같은 옷 입는 감독 스필버그
IT 패션 유행으로 명품 시장 하강, 패스트 패션 시장 비상

올 1월 말,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버그가 딸을 얻은 후 출산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하는 날, 페이스북에 이런 포스팅을 올렸다. "회사 복귀 첫날, 나 뭐 입지?" 그 밑엔 자기 옷장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주커버그의 페이스북 페이지

회색 반팔 티, 회색 반팔 티, 회색, 반팔 티, 회색 후트 티, 회색 후드 티… 누가 봐도 다 똑같아 보이는 옷… 그걸 갖고 고민이라고. 그의 의도대로 이 포스팅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자기 옷장마저 마케팅에 이용하는 홍보의 귀재에서부터 옷 고를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바쁜 천재 CEO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IT 업계엔 티셔츠, 청바지, 운동화가 유니폼

주커버그 뿐만 아니라 고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 프리젠테이션 때마다 늘 청바지에 검정 풀오버를 입고 나와 그 스타일이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영화 ‘아이언 맨’의 실제 모델이자 진정한 ‘뇌섹남’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 역시 티셔츠와 운동화,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IT 계열은 아니지만 청바지와 검정 스웨터를 즐겨 입은 거장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강연 후 왜 늘 똑같은 옷을 입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아침에 일어나서 뭘 입을까 고민하는 일이 너무 귀찮고 싫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디자인과 똑같은 색상의 옷을 옷장에 채워 넣죠, 아침에 일어나 잠결에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입어도 실패할 일이 없으니까요."

스필버그의 대답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다. 바쁜 점심 시간에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게 귀찮은 현대 직장인들처럼, 아침에 뭘 입을 지 생각하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정서적 물리적으로 낭비처럼 느껴지는 셈이다.

스티브 잡스

패션계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가뜩이나 값비싼 고급 신상들이 잘 안 팔리는데, 돈을 써야 할 세기의 부자들이 몇 만 원, 비싸 봐야 십여 만 원 하는 운동화와 티셔츠를 유행시키고 있으니. SPA나 패스트 패션의 매출에 불을 지피는 모양새다. 게다가 이들의 영향력은 너무 막강하다. 그들의 추종 세력들 또는 IT 업계 종사자들에게 청바지와 티셔츠, 운동화는 이제 유니폼이 되었다.

◆ 마크 제이콥스, 피비 필로, 조지오 아르마니도 패션쇼 피날레에선 쿨하게 입어

이들은 재력과 상관없이 편한 옷을 입고 어떻게 보일 지에 대해서는 참 무심해 보인다. 그렇게 입는 게 오히려 쿨해 보이고 한 껏 멋을 부린 사람들이 오히려 머리에 든 것 없이 겉만 화려한 속 빈 강정처럼 여겨질 정도다. 더 기가 막힌 건 하이 패션을 선보이고 있는 고가 브랜드의 디자이너들 역시 이런 패션에 동참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미 지금은 떠났지만 오랜동안 루이비통의 디자이너로 일한 마크 제이콥스는 청바지 애호가이자 컬렉션 피날레 때마다 항상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나 미국의 랄프 로렌 역시 데님 팬츠 애호가다. 흐르는 듯한 실루엣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하이 패션의 대명사인 조르지오 아르마니 역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피날레에 등장한다. 최근에는 지적이고 스마트한 스타일로 유명한 스탤라 맥카트니와 피비 필로까지 가세했다.

피비 필로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아 거의 보호색으로 불리고 있는 이런 무채색 계열의 옷들과 데님 패션이 대세를 이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육체적인 노동보다 실내에서 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들에게 거추장스럽고 화려한 의상은 아무 도움이 안된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2014년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패션 신조어 놈 코어의 유행도 이와 맞닿아 있다. 뉴욕 타임즈는 놈 코어의 유행을 "자신이 70억 인구 중의 한 사람임을 깨달은 패션"이라고 진단했다.

IT업계 종사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21세기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IT패션의 유행. 남들과 다른 개성의 표현이 패션이라고 생각해 온 사람으로서는 당혹스런 유행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보호색, 몰개성이 유행이 되다니.

회색의 콘크리트 빌딩 숲에서 보호색으로 몸을 가리고 일하겠다는 데 태클 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늘 같은 옷만 입는 게 과연 창조적 아이디어에 도움이 될까 의문이다.

◆ 옷은 쿨하게, 피부는 광나게! ‘놈 코어' 유행으로 하이퍼 리얼리즘 시대 열리나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 조지오 아르마니, 라프 시몬스

패션 감각은 연습하지 않으면 금새 퇴보된다. 반대로 매일 매일 약간의 센스만 발휘하면 나날이 발전하는 게 또 패션 센스다. 뭘 입을 지 너무 귀찮아 하지 말고 조금만 패션에 관심을 가져보라. 잠깐의 안모의 투자가 쌓여 나중엔 그 멋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녹아 나올 것이다.

참, 주커버그나 잡스가 멋있는 건 주커버그이고 잡스이기 때문이다. 그와 똑같이 입는다고 모두 그와 같이 보이지 않는 다는 걸 잊지 마시길!

PS 놈 코어는 2014년부터 대두된 패션 신조어. 노멀과 하드코어의 합성어로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이 포인트지만 평범한 느낌을 주기 위해 고도로 계산된 스타일. 데님 팬츠, 흰색 셔츠, 회색 티셔츠, 운동화 등이 기본 아이템이다. 옷의 스타일이 평범하고 심플하기 때문에 얼굴을 가꾸는데 특히 피부를 가꾸는 트렌드에 일조한 유행이기도 하다. 놈 코어의 유행은 엉뚱하게 패션보다 메이크업 제품에 지갑을 열게 하는 특이한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평범해 보이는 스타일의 의상에는 흔히 누드 메이크업이라 할 정도로 화장을 하지 않은 듯하게 하는 게 포인트. 이런 트렌드 덕분에 최근에는 각종 클렌징 제품이 쏟아져 나왔고, 두꺼운 커버력의 파운데이션보다 컨실러와 민낯크림, 쿠션 커버 등 결점만 투명하게 보완하는 제품의 유행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조명숙은 패션미디어 마담 조 대표이자 ‘보그코리아' 전 패션 디렉터 출신 독립 저널리스트다. 프랑스 패션지 ‘마리끌레르’를 거쳐 런던의 센트럴 센 마틴에서 공부했다. 최근에는 강의 활동과 더불어 패션 관련 서적을 집필하고 있으며, 마담 조라는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패션 미디어 혁명을 꾀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마담 조는 올여름 오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