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는 지난해 [3040 파워 이코노미스트]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 있는 30대, 40대 젊은 경제학자들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했습니다. 심층 인터뷰를 통해 어떤 연구를 하고 있고 사회 이슈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들어봤습니다. 2016년에는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30대, 40대 한국인 경제학자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미경제학회(KAEA) 전현직 임원진 등으로부터 추천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 최근 집 앞 통신사 대리점에서 스마트폰을 산 A씨는 인터넷으로 자신의 스마트폰 정보를 찾아보다 깜짝 놀랐다. 인터넷에서는 자신이 구매한 가격보다 무려 절반이나 싸게 스마트폰을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대리점에 전화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졌지만, 대리점은 “인터넷은 원래 싸게 파는 게 당연하지 않냐”며 맞섰다.

# 사회생활 2년차에 접어든 B씨는 잦은 회식과 술자리로 인해 몸무게가 입사 초기보다 20kg이나 늘어 100kg에 육박했다. 자주 피곤함을 느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건강검진에서 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을 경우엔 실비 보험 가입이 어려울 수 있다며 건강검진을 받기 전에 보험을 들어두라고 조언했다. B씨는 그 날 바로 실비 보험에 가입했는데, 나이도 어리고 병력도 없어 쉽게 가입할 수 있었다.

위 사례는 모두 정보비대칭 상황이다. 정보비대칭이란 거래 상황에서 어떤 정보를 한 쪽만 알고 있거나, 상대방에 비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A씨는 통신사 대리점은 알고 있는 스마트폰 가격 정보를 모르고 있었고, 보험사는 B씨의 건강 정보를 모르고 있었다. 이같은 정보의 문제는 거래가 발생하는, 경제 전반에 폭넓게 나타날 수 있다.

김경민 아이오와 주립대학(The University of Iowa) 교수는 정보비대칭성 등 정보에 따른 여러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을 분석하고, 해결 방법을 탐색하는 정보경제학자다. 그는 경북 김천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97학번)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200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제학과에서는 매년 그 전해 학위 수여자들 중 한 명을 정해 ‘윌리엄 포크 캐리(William Polk Carey Prize)’ 상을 수상하는데, 김 교수가 2009년 수상자다.

김 교수는 정보비대칭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거래 전 발생하는 판매자와 구매자 간 커뮤니케이션에 주목했다. 그는 필립 키르허(Philipp Kircher) 에딘버러 대학 교수와 함께 한 연구에서, 판매자와 구매자의 칩 토크(cheap talk)가 정보비대칭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칩 토크란 비용이 들지 않고(costless) 책임도 따르지 않는(non-binding) 의사 전달 수단을 말한다. 흔히 지인들끼리 지나가는 말로 “C 제품을 써봤더니 참 좋더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한 말이 녹음돼 법정에서 증거로 쓰이거나, 나중에 꼭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라면 이는 칩 토크가 아니다.

한편 현재 김 교수는 아이오와 대학 소속이지만, 여름이 지나면 플로리다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University of Miami)으로 옮길 예정이다. 김 교수는 “아이오와 대학도 좋은 연구 환경이지만, 마이애미 대학의 경제학 이론 그룹이 제 성향과 훨씬 잘 맞는 편이고, 전반적 학과 분위기도 마이애미 대학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조용한 대학도시보다는 대도시로 옮겨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김경민 아이오와 대학 교수는 이직 문제로 바쁜 와중에도 정보경제학에 대해 최대한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주려 애썼다. 그는 첫 메일에서 "경제학자들도 자기 분야 밖의 논문을 읽는 게 쉽지 않은데, 경제학 이론 쪽은 더욱 힘들 것"이라며 자신의 논문을 일일히 설명해줬다.

-정보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정보경제학은 각종 경제 상황에서 정보의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을 분석하고 해결 방법을 탐색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살 때 혹시나 잘못된 물건은 아닐지 걱정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정보의 문제다. 고민이 많이 되는 경우 아예 구매를 포기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상호간 이득이 있는 좋은 거래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여러 해결책이 있을 수 있는데, 판매자가 품질 보증을 하거나 정부에서 소비자 보호를 하는 것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정보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찾고,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연구하는 분야가 정보경제학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대해 설명해달라.

“주로 탐색(search) 상황에서 나타나는 정보의 문제를 분석하는 이론을 연구해왔다. 이론적인 연구라 특정 시장을 대상으로 하진 않았는데 증권 장외시장, 부동산시장, 노동시장 등이 제 연구 분야와 가깝고, 제 연구가 보다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시장들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엔 응용 분야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정보의 문제가 있는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의 문제, 그리고 인터넷의 정보 제공 기능 및 온라인 마켓의 작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금융시장에서 정보 비대칭성이 발생하는 예를 들어달라.

“지난 금융위기 때 특히 문제가 되었던 부분 중 하나가 금융기관들 사이의 거래였다. 증권이나 파생상품이 상당수 부실화되자 시장에서는 거래 상대방의 자산이 부실하지 않은지, 채무 불이행 가능성은 없는지 등에 대해 서로 신뢰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런 정보의 문제 때문에 금융기관간 거래가 원활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금융기관들의 단기적 유동성이 특히 타격을 받았다.

정보의 문제는 훨씬 광범위하게, 어떻게 보면 모든 금융시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장과 상품의 특성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보의 문제는 전문성의 차이 뿐만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역할의 차이만으로도 생길 수 있다. 펀드에 가입하는 고객의 경우 펀드 상품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 채권을 거래하는 펀드매니저와 브로커도 전문성 차이는 크지 않더라도 특정 채권에 대해 아는 정도는 다르다. 정보의 문제는 어느 시장, 어떤 거래에도 있다고 봐야 한다.”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효율성을 완화시키는 방안으로 ‘내생적 시장 세분화’를 제시했다. 판매자와 구매자 간 균형적인 인센티브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는데.

“홍콩 침사추이 거리를 걷다 보면 귀신 같이 한국인이라는 걸 알아채고 다가와 “짝퉁 롤렉스 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왜 이 사람들은 진짜 롤렉스 시계인 척 속이지 않는 걸까? 침사추이의 짝퉁 판매자가 원래 정직해서 그럴까? 아마도 진짜라고 하면 의심을 불러일으켜서 아예 팔지 못할 수도 있으니 차라리 가짜라고 밝히고 낮은 가격이라도 받아보려는 속셈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모든 판매자가 정직하면 구매자는 의심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면 짝퉁을 진짜로 속일 유인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내생적 시장 세분화(endogenous market segmentation)는 거래 과정에서 정보의 문제가 있을 때 이런 다른 유인들이 있기 때문에 일부의 판매자가 자발적으로 짝퉁임을 밝히고, 그 때문에 어느 정도의 속임은 있을 순 있지만 그래도 양질의 물건들도 거래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판매자들이 상품의 질에 따라 판매 전략을 달리 한다는 이유만으로 정보의 문제가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균형적 인센티브는 이처럼 판매자의 행위가 구매자에게 적절한 유인을 주고, 역으로 구매자의 행위가 판매자에게 적절한 유인을 주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경우를 지칭한다.”

-항상 균형적 인센티브를 기대할 순 없을 것 같다.

“정확히 봤다. 항상 균형적 인센티브가 성립한다고 보긴 힘들다. 그런 측면에서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조건에서 균형적 인센티브가 나타날 수 있느냐’이다. 예를 들어, 짝퉁이 아예 가치가 없거나 가격이 너무 높게 책정되면 어느 누구도 짝퉁을 판다고 밝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탐색 비용이 없는 완전 시장의 경우 모든 판매자들이 높은 가격을 받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보의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상품의 특성, 시장의 작동방식에 따라 균형적 인센티브가 나타날 수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김 교수는 2004년 유학을 떠나며 당시 오랫동안 사귀어 온 여자친구와 결혼했다. 대학원 3년차에 태어난 첫째 아들은 만 9살, 둘째 아들은 이제 만 3살이다. 김 교수는 “딸을 낳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셋째까지 낳고 싶다”고 했다.

-논문을 보면, 거래 전에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정보비대칭성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나.

“칩 토크(cheap talk)가 매력적인 면은 그 이름이 나타내는 것처럼, 본질적인 비용이 들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시장 참가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서만 그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는 균형적 인센티브를 찾아야 한다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고, 현실적으로는 제3자의 개입이나 불필요한 비용 없이도 작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칩 토크 이론 자체는 이미 약 30년간 활발히 연구가 진행돼 왔지만, 실제 거래 상황에서 칩 토크의 효과와 그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제 연구는 칩 토크를 탐색 환경에 적용한 것이다.”

-칩 토크(cheap talk)란 무엇인가.

“사실 칩 토크는, 정확하게는 비용이 없고(costless) 책임도 따르지 않는(non-binding) 의사 전달 수단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녹음된 말은 경우에 따라 법정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칩 토크가 아니다. 반대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몸짓은 칩 토크가 될 수 있다.”

-칩 토크의 단점은 없을까.

“여러가지 단점이 있다. 이론적으로는 상대의 행동에 대한 믿음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을 하기 힘들다는 점이 있다. 조금 더 현실적인 면에서는, 정보의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기는 힘들고 그보다 더 좋은 대안들이 종종 있다는 문제가 있다. 정보의 문제는 다양한 맥락에서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해결책이 단 한 가지라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대안들을 생각해 보고 정보의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다.”

-칩 토크만으로 정보 비대칭성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필립 키르허(Philipp Kircher) 에딘버러 대학 교수와 함께 한 연구에서 칩 토크가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 연구의 중요성은 그 결과 자체보다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한 환경 조건들을 찾아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칩 토크가 시장에서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칩 토크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장 환경이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누군가 거짓말을 하는 건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이고, 환경이 적절히 바뀐다면 대화만으로 정보의 문제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칩 토크가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적절한 환경은 무엇인가.

“연구에서 주목한 부분은 ‘경쟁’이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선 참가자들의 시장 지배력이 충분히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독과점의 비효율성과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시장 거래 메커니즘이 경쟁의 효율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거래는 최종적으로 판매자와 구매자 간 합의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판매자가 가격을 깎아달라고 하는 특정인에게는 할인을 해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칩 토크의 정보 전달 기능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경매와 같은 경쟁적인 거래 메커니즘은 경쟁의 효율성이 충분히 반영된 환경이다. 결과적으로 정보와 관련된 특정한 조건이 추가되면 칩 토크의 정보 전달 기능도 완전히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김 교수의 취미는 테니스다. 주변 지인들과 가끔 치곤 한다. 요즘엔 온 가족이 모여 한국의 ‘쿡방(요리방송)’ 프로그램을 재밌게 보고 있다고 한다. 자장면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서너시간 거리에 있는 시카고에 가서 한국 음식도 먹고, 한국 음식 재료도 사오곤 한다.

-인터넷의 발달으로 소비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손쉽게 찾아내고, 판매자도 소비자들의 이같은 성향을 파악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정보 격차가 줄어들면 정보 비대칭성은 해결되는 것 아닌가.

“사실 인터넷 시장 초기부터 경제학계 내에서 이런 예측이 있었다. 특히 거래 비용의 감소로 전반적인 가격이 감소하는 한편, 동일한 물건에 대한 가격 분산도(price dispersion)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돼 왔다. 이전엔 같은 물건일지라도 정보가 부족하다보니 물건값에서 차이가 났을 수 있지만, 인터넷이 발달할수록 가격 차이도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최근 연구들은 두 가지 예측 모두 맞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 대상과 데이터에 따라 결론이 어느 정도 달라지긴 하지만, 어떤 상품의 가격은 온라인에서 오히려 비싸고, 온라인 시장에서도 유의미한 수준의 가격 분산이 여전히 나타난다는 것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들은 이런 사실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자연스러운 예측들이 빗나간 이유를 찾으려 하고 있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경제학의 기본 문제와 기본 원칙들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느냐는 조금 더 생각해 볼 문제다.”

-앞으로 연구 계획에 대해 소개해 달라.

“최근에는 조금 더 응용적인 문제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앞으로는 이 쪽으로 시간을 더 할애할 생각이다. 특히 금융 시장의 가격 발견(price discovery) 기능과 관련된 이론적, 정책적 문제들, 그리고 온라인 시장의 작동과 관련 규제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더 연구해 볼 계획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금융 관련 시장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환율, 주가, 이자율 등의 주요 지표에는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그런 경제 지표들이 경제 상황을 효율적으로 반영하고, 경제 상황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장 가격의 정보 제공 기능은 그런 주요 지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 회사의 현황을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정확하게 판단하는 방법은 그 회사의 주가를 보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이처럼 시장 가격이 시장 상황을 반영하는 것을 가격 발견 기능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가격 발견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관련 경제 주체들에게 적절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을 수 있다. 정확히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정책적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해 보고 싶다.”

김 교수의 아내는 한국에서 경력을 쌓아오다 김 교수를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김 교수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아내는 당시 결정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며 “둘 다 어리고 무모했지만, 그래서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20대 초반, 대학 친구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뜻이 있었나.

“어릴 적 우연히 케인즈와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한 짧은 책을 읽고, 집안의 수재로 일컬어지던 사촌 큰형님이 서울대 경제학과로 진학하는 걸 보면서 경제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생겼다. 이후 고교 시절 수학과 사회 과목들을 좋아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대학 진학 후, 경제학 수업을 들으면서 분석의 엄밀함을 추구하면서도 현실과의 관련성을 놓지 않으려는 경제학에 빠져든 것 같다. 대학 시절 친구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경제학은 나를 위한 학문’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교수님들을 보면서 그 학식과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 3학년 초에 우연히 한국고등교육재단 대학특별장학생에 선발된 것이다. 그때까진 유학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 있었는데,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유학에 뜻을 두고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매우 뛰어난 친구들을 보면서 자극도 많이 받았고, 유학에 대해서도 훨씬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 후, 재단의 해외유학장학생에 선발되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재정적으로도 도움을 받아 유학을 나갈 수 있었다.”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가고 싶었던 교수님은 누구신지.

“모든 교수님들이 저의 롤모델이긴 했지만, 그 중 특히 세 교수님 가까이에 있으면서 더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은퇴하신 이준구 교수님과 아직 학부에 남아 계신 김대일 교수님, 김선구 교수님이다. 이준구 교수님으로부터는 학자로서의 자세와 교육에 대한 열정을, 김대일 교수님으로부터는 경제학의 현실 설명력 및 적용 가능성을, 김선구 교수님으로부터는 경제학 이론의 멋을 배웠다. 이준구 교수님께서 제가 2학년 때 해주신 말씀이 하나 있다. ‘학자는 명예로운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다’. 유학 시절, 그리고 지금도 가끔 그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시절 지도교수님에 대해 소개해달라.

“저는 조금 드물게 두 분을 공동 지도교수로 모셨다. 앤드류 포슬웨이트(Andrew Postlewaite), 조지 마일라스(George Mailath) 두 교수님이다. 두 분 모두 경제학 전반에 많은 기여를 했고, 현재 각각 경제이론 탑필드 저널인 American Economic Journal: Microeconomics와 Theoretical Economics에 편집장으로 계시는 등 학계에서 두말할 여지 없이 대가로 인정받는 분들이다. 두분 다 30년 이상씩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근무하시면서 좋은 제자들도 많이 기르시고, 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제학과를 지금의 모습으로 키우고 또 유지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신 분들이다.

두 분 교수님께 많이 배우고, 많은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제 연구 분야는 두 분의 주 연구 분야와 많이 다르다.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종종 두 교수님의 분야와는 거리가 있는 분야를 연구한 경우가 많은데, 두 교수님들이 모두 제자들이 독립적으로 연구 분야를 찾기를 유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제자들이 당신들보다 더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고 계신다.

두 분의 성격이 다른 것이 제겐 큰 도움이 됐다. 마일라스 교수님은 분석의 엄밀함을 강조하시면서 직접적으로 학생의 문제를 지적하는 성격인 반면, 포슬웨이트 교수님은 경제학적 직관을 강조하시고 좀 더 너그럽게 학생들을 대해주시는 분이었다. 가끔 반대인 경우도 있었지만, 한 분에게는 당근을 받고, 다른 한 분에게는 채찍을 맞으면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두 분이 성격은 다르지만 제자들에 대한 애정은 같다. 3년차 여름 첫 번째 논문을 완성한 후, 두 분께서 4주에 걸쳐 금요일 오후마다 서너시간씩 제 논문 내용 전체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셨던 걸 잊지 못한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때는 제 영어 실력도, 발표 실력도 훨씬 부족했다.”

김 교수는 조만간 옮겨가는 마이애미 대학에 대해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마이애미는 미국에서도 남미 문화의 영향을 특히 강하게 받아 약간은 특이한 지역으로 인식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 기대된다”며 “홍콩에서처럼 문화적으로 새로운 지역인 만큼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교직 생활은 미국이 아닌 홍콩과학기술대학에서 시작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해가 2009년이다. 금융위기 직후라 경제학 박사 잡 마켓이 아주 안 좋았을 때였다. 원래 미국에 남거나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몇 개의 좋은 미국 학교에서 기회가 있었지만 학교 방문 후 갑자기 채용 자체가 취소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던 중 홍콩과기대에서 인터뷰를 했고, 그 쪽 교수진에 좋은 인상을 받아 홍콩으로 진로를 바꾸게 됐다. 서울대 은사 중 한 분이신 김선구 교수님을 비롯해 여러 한국 교수님들이 홍콩과기대에서 성공적으로 경력을 쌓으신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미국으로 1년만에 돌아온 것은 홍콩 생활에 막 적응하려던 2009년 가을, 예상치 못하게 아이오와 대학에서 잡오퍼를 받아서다. 아이오와 대학은 2009년 초 제게 잡오퍼를 주려 했으나 금융위기 때문에 교수 채용이 전면 금지돼 무산됐던 곳이다. 2009년 채용이 허락되자 저에게 연락을 했다. 1년만에 이직하는 것이 홍콩과기대에 미안했지만, 지도교수님들의 조언을 듣고 제 경력을 위해서는 미국에 돌아오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홍콩과기대 분들도 제 결정을 이해해주고 좋은 성과를 거두길 기원해주셔서 무겁지 않은 발걸음으로, 홍콩에 대한 많은 좋은 기억들을 간직한 채,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같은 길을 가려 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다. 첫째, 어떤 선택이라도 조금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생각해야 한다. 무슨 과목을 들을까, 어떤 학교를 가고, 어떤 전공을 하고, 어떤 직장을 잡을까 등 한 두 단계 더 앞을 보며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예를 들자면, 대학원을 랭킹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랭킹이 높으면 유리한 점도 있지만, 전공하려는 분야 혹은 학교 분위기가 본인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당장은 더 유명한 학교에 가는 게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대학원 과정에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 그리고 졸업 후 진로는 어떻게 되는지 등 여러 면에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졸업 후, 직장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또 유학 준비를 1년 더 하거나, 박사 과정에서 1년 더 있는 것이 당장에는 손실이 커보일 수 있지만, 커리어 전체를 보면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학계 쪽으로 진로를 정하는 경우, 최소 30년 이상 연구를 한다고 생각하고 그에 맞게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기 커리어를 바라보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둘째, 일찍부터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좋다. 제가 학생들에게 누누이 강조하는 것인데, 연구, 특히 경제학 연구는 혼자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끌어내고, 그걸 자기 연구에 녹여내는 것이 연구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렇게 해야만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생각을 발전시키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사실 저에게도 아직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 능력 부족으로 자기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한국 학생을 볼 때마다 더욱 안타깝다. 요즘 학생들은 영어도 잘 하고 어릴 때부터 외국 경험을 한 경우도 많은데,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많은 한국 학생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좋은 학자로 성장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