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우웅, 부우웅'

올해 1월 세계 최대 전자전시회 CES 2016이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 퀄컴과 인텔의 전시관에는 공기를 가르는 프로펠러 소리가 가득했다. 소리의 주인공은 거대한 곤충 모양을 한 드론(drone·무인기)이었다. 새 반도체 칩이나 소프트웨어 기술을 전시하던 이전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퀄컴과 인텔은 지난해 하반기 드론용 반도체 시장 진출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인텔은 중국 드론업체 유닉인터내셔널(6000만달러)를 비롯해 에어웨어, 프레시전호크 등에 투자했다. 퀄컴은 드론 전용 플랫폼인 '스냅드래곤 플라이트'를 내놓기까지 했다.

드론 반도체 시장은 3년 후 현재보다 10배 이상 커진 10억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스마트폰과 PC 시장의 정체로 공급 과잉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드론, 웨어러블, 사물인터넷(IoT) 등 다양한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시장이 부상하고 있다. 1년 6개월 주기에 맞춰 반도체의 집적도가 2배씩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의 의미가 퇴색하고, 집적도 경쟁보다는 다양한 기능의 제품 수요에 반도체 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도체 수요가 다변화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75%인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더욱 빠르게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2014년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는 2719억1700만 달러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825억2600만 달러)의 3배였다. 전문가들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가 2017년까지 301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많은 기기에 다양한 반도체가 탑재되면서 신규 수요에 대한 발 빠른 대응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퀄컴과 인텔이 드론용 반도체 시장 진출을 결정하고 실제 제품을 내놓기까지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런 속도전이 가능했던 비결은 세가지다. 첫번째, 이들 기업은 새로운 수요에 발맞춰 반도체를 설계하는 탁월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두번째, 설계한 반도체를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 자체 생산라인이나 파운드리(위탁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들은 한국과 대만의 대형 파운드리에 물량을 맡긴다. 한국과 대만 파운드리는 인텔과 퀄컴 처럼 대형 거래선 위주로 수탁 생산하고 있다.

세번째, 미국 정부 주도의 생태계가 조성돼 있다. 인텔과 퀄컴은 창업 초기에 미국 정부의 벤처 펀드로부터 자금을 조달했고, 이들이 개발한 원천 기술은 연구조합(SEMATECH)을 통해 국제 표준이 됐다. 인텔의 PC 프로세서 표준과 퀄컴의 롱텀에볼루션(LTE) 모뎀 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도체와 같은 지식기반산업에서는 초기에 산업의 표준이 되는 원천기술(특허)을 장악해 시장을 선점해야 장기간 고이윤을 향유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무어의 법칙 폐기'로 상징되는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바라보고만 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세계적인 회사가 있지만,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한참 뒤처져 있다. 한국의 팹리스(생산 설비가 없는 반도체 설계회사)들은 대부분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 협력업체로 묶여 있어 새로운 수요처 발굴과 투자 능력이 떨어진다.

중소 규모인 한국의 팹리스들이 설계한 반도체를 위탁생산할 파운드리도 동부하이텍 단 한 곳 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팹리스들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중국 파운드리에 제품 생산을 위탁하고 있는데, 기술 유출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생산기간이 길고 비용도 많이 드는 문제점이 있다. 또 대기업들이 중소 팹리스에 맞는 제품 영역까지 침투해 생태계를 위협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퀄컴의 드론 플랫폼 ‘플라이트’.

◆ 무어의 법칙 이후 준비하지 못하는 한국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한국의 팹리스 기업의 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점유율은 1% 미만이다. 코아로직 등 10년 전 연매출 1000억원을 돌파하며 주목을 받았던 유망 팹리스들의 매출 성적표는 매년 뒷걸음치고 있다. 이 기간에 한국의 매출 상위 팹리스 16개 업체 중 9곳의 매출액과 이익이 30% 이상 급감했다. 왜일까.

한국의 팹리스 기업 대부분은 TV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전력관리 반도체(PMIC)나 터치칩, 센서 등을 설계한다. 미국이나 대만에 비해 한발 늦게 시스템반도체 시장에 진출하면서 안정적인 매출을 낼 수 있는 대기업 납품업체로 시작했다. 팹리스들은 2000년대 초반 삼성 LG 등 대기업 수주 물량으로 순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연 매출 1000억원을 내는 회사들도 몇개 나왔다.

그러나 한국의 팹리스들은 대기업 납품업체로 안주하다 보니 제품 포트폴리오 확대를 등한시해 기술 트렌드와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또 고객사인 대기업이 어려워지거나 계약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직격탄을 맞는 취약한 구조에 놓여있다. 예컨대 LG디스플레이를 주요 고객사로 둔 실리콘웍스의 2013년 영업이익은 디스플레이의 수요 부진으로 전년보다 30% 가량 줄었다

한국 팹리스는 대부분 중소 규모라 파운드리와 위탁생산 계약을 할 때 협상력에도 한계가 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연 매출 3000억원 이상을 낼 정도의 궤도에 오르면 파운드리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 팹리스의 매출액은 1000억원에 못미친다.

전문인력 확보가 어려운 것도 팹리스 발전을 저해하는 핵심 요인이다. 대기업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팹리스 기업들이 우수한 반도체 설계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배출된 석·박사급 반도체 설계 인력은 200여명에 그쳤다. 전문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세계적인 팹리스들과 견줄만한 기술 개발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제조사에 카메라 관련 시스템 반도체를 공급하는 한 팹리스 업체 대표는 "국제적인 경쟁력이 뒤처지다보니 중국을 비롯한 시스템 반도체 강국이 뛰어들지 않는 1000억~2000억원 규모의 작은 시장들만 골라 공략한다"며 "만약 중국이 이 시장까지 넘보기 시작하면 버텨낼 국내 업체들이 몇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아트의 윤형민 대표는 "미세공정 개발로 가면 자본 싸움이어서 팹리스가 뛰어들 엄두를 못 냈지만, 많은 기기에 다양한 반도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면서도 "그러나 한국의 경우 작은 업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정부 지원이나 업체간 협력이 부족해 대응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비메모리 반도체 공장.

대기업이 중소 팹리스들의 사업 영역에 손을 뻗치면서 생태계가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지센서 업체인 픽셀플러스는 최대 고객사 삼성전자에 '호되게 당한' 업체 중 하나로 꼽힌다. 픽셀플러스는 삼성전자를 등에 업고 2005년 미국 나스닥 상장에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삼성전자가 자체적으로 이미지센서 사업에 뛰어들면서 실적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 결과 나스닥 상장 3년 만에 퇴출당하는 쓰라림을 겪었다. 이후 보안카메라 센서로 재기에 성공해 2015년 코스닥에 상장했다.

픽셀플러스 이서규 대표는 코스닥 상장 기념 기자회견 당시 "국내 대기업에 매여있으면 성장할 수 없다"며 "(삼성전자가 진출한)스마트폰과 태블릿PC용 이미지센서 시장에는 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의 한 팹리스 대표는 "삼성전자의 기술력은 상상 이상"이라며 "아무리 차별화된 기술이라도 삼성전자가 자체 사업 확대를 결정하면 금방 도태된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 한 전문가는 "대기업이 갈 길이 있고 중소기업이 가야 할 길이 있다"며 "뒤에서 든든하게 뒷받침을 해줄 중소업체들과 같이 가야지 이들을 위기로 몰아넣어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중소기업이 할 수 없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기술 개발에 앞장서야 한다"며 “중국이 반도체 굴기에 나선 현 시점에서 국내 생태계까지 흔들리면 결국 손해를 보는 건 삼성전자”라고 강조했다.

장비 업체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1년6개월마다 집적도가 2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이 폐기되면서 반도체 제조사들의 장비 발주 주기가 과거 보다 길어졌기 때문이다. 반도체 소재 전문기업 PKL의 여운석 전무는 "시스템 반도체 14나노 공정 전환 때까지만 해도 공격적인 투자가 이어졌는데, 10나노부터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며 "공정 장비업체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기업의 투자 보류 여파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 위기의 한국 반도체 대응책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지난해 150개 국내 팹리스 회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0%가 정부 지원 정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에는 수준 높은 기술력과 우수한 인력, 장기간의 개발 기간이 필요하다.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 없이 영세 기업이 홀로 성공할 수 없는 영역인 셈이다.

세계적인 시스템 반도체 회사인 대만 미디어텍은 체계적인 성장 단계를 잘 밟은 사례로 꼽힌다. 미디어텍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모뎀 칩은 대만 국책 연구기관인 산업기술연구원(ITRI)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오지 못했다. 모뎀이 유망한 분야가 될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ITRI는 10년 이상 모뎀 설계 인력을 육성해 미디어텍에 합류시켰다.

함께 커갈 수 있는 파운드리를 만난 것도 주효했다. 미디어텍은 일본에 위탁생산을 맡기다가 대만의 파운드리 회사 TSMC를 만나면서 부흥기를 맞았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로 걸음마를 뗄 때 대만은 파운드리에 집중하며 해외 IT기업의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만내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한국에는 동부하이텍 정도만이 순수 파운드리로 꼽힌다. 많은 팹리스는 중국 대만 등의 파운드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 파운드리를 이용하면 기술 유출에 대한 위험이 존재하는 데다 국내 파운드리를 이용할 때 보다 생산기간이 길어지고 비용도 많이 든다.

미디어텍은 또 M&A(인수합병)를 통해 디지털TV 칩세트와 휴대폰용 프로세서 등 새로운 기술을 확보하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신규 사업을 벌였다. 넥서스칩스의 이덕명 대표는 "세계 2위 팹리스인 대만 미디어텍이 선제적인 M&A를 통해 경쟁력을 키운 대표적인 사례"라며 “대만 반도체업체들은 서로 투자를 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는데, 공식적으로 다른 회사지만 실제로는 한 기업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산업연구원은 한국 팹리스 업체들이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체제'로 난관을 돌파해야한다고 밝혔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 연구위원은 “중국에 자리잡은 각종 연구소나 현지기업을 활용해 연구개발, 소프트웨어 외주개발, 마케팅 자원 등에 투자하면 중국 시장에 효과적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