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들리는 단어가 '기업 구조조정'이다. 경영난에 빠진 해운·조선업종에 구조조정 메스를 든 '집도의'가 임종룡(57) 금융위원장이다.

최근 그는 체중이 3㎏ 줄었다. 집무실 책상에 부실기업과 관련된 보고서가 어지럽게 쌓이면서 "살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담배도 늘었다. 하루 두 갑은 있어야 한다. 평소보다 커피도 늘었다.

지난달 26일 임 위원장은 정부 차원의 구조조정 실무를 총괄하는 '산업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협의체'를 주재하면서 '수술'의 원칙을 밝혔다. "경쟁력 없는 산업과 기업은 경쟁력을 보완하거나 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 신속하고 적극적인 구조조정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날 그는 '사즉생(死則生)'이란 말도 썼다. "어떤 말로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국민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기업주든, 노조든, 채권단이든, 저희 금융 당국이든 죽을 각오라야 살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현직 관료 중 구조조정 최적임자

올 초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이 임명될 당시 임 위원장도 부총리 후보에 포함됐다. 그러나 "임 위원장은 기업 구조조정을 맡아야 한다. 그 사람 말고 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됐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말했다. 관가에서 '구조조정 전문가'하면 외환위기 당시의 이헌재 금융감독원장, 저축은행 부실 사태를 처리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대표적 '칼잡이'로 꼽힌다. 임 위원장은 선후배 경제 관료들이 손꼽는 구조조정 전문가이지만, 독한 칼잡이로 소문이 나 있지 않은 이유는 얌전한 외모에, 조용히 일처리하는 업무 스타일 때문이다.

그는 사무관이던 1980년대 중반 재무부 산업금융과에 배치되면서 기업 구조조정 업무에 손댔다. 당시 한국 경제는 중동 건설 붐이 꺾이면서 건설 및 중화학공업 등에 대한 구조조정이 시급했다. 한 전직 관료는 "지금과 달리 개별 업종에 대한 정부의 관여가 커서 일거리도 많았다"고 했다.

그 뒤로는 외환 위기 당시인 1998년 봄, 미국 유학(오리건대 경제학 석사)에서 돌아오자마자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의 금융기업구조개혁반 반장을 맡아 당시 진행됐던 대규모 빅딜과 구조조정에 관여했다. 당시 자동차, 전자, 반도체 등은 물론이고 중화학공업의 경우 발전 설비와 선박 엔진 등을 한곳으로 모으는 등의 '8개 업종 빅딜'을 정부가 추진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이 은행 퇴출에서부터 주력 업종 '빅딜'까지 진행하는 상황에서 정부의 공적 자금 지원 등을 챙기고 구조조정 대안을 당시 이규성 재정경제부장관에게 보고해 구조조정의 틀을 만들어가는 실무 역할을 했다.

1년 뒤 파격적으로 요직인 은행과장에 임명됐다. 정부 관계자는 "현직 관료 중에 구조조정에 대해 임 위원장만큼 많이 아는 사람이 없다. 외환 위기 당시 관여했던 관료들이 모두 은퇴하고 혼자 남았다"고 말했다. 이후로는 카드 사태나 저축은행 사태 등 금융업에 대한 정부의 감독 차원에서 구조조정이 있었지만,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은 사실상 없었다.

주류로 살아온 비주류

임 위원장은 전남 보성이 고향이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3학년 때 행시(24회)에 합격했지만, 출신 지역도, 학벌도 30여년 전 재무부 주류(主流)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위 'KS(경기고-서울대) 마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도 재무부 이재국(현재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의 엘리트 코스를 달린 것은 사무관 시절부터 "일 잘한다"는 평가를 달고 다녔기 때문이다. 축구 실력도 도움이 됐다는 농반진반의 말이 떠돈다. 지금이야 운동과는 거리가 먼 체구지만, 임종룡 사무관은 날리던 아마추어 축구 선수였다. 옛 재무부에서 매년 5월 열렸던 국(局) 대항 체육대회의 꽃이 축구였다. 한 전직 관료는 "축구 잘하는 사무관을 입도선매하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는 이재국 축구팀 부동의 라이트 윙이었다. 당시 레프트 윙이었던 윤용로 전 하나은행장은 "발이 빠르고 시야가 넓었다. 공 좀 찰 줄 아는 친구였다"고 했다. 일 잘하고, 축구도 잘하는 그는 핵심 과장직을 거치면서 엘리트 관료로 성장했다.

워크홀릭(일 중독자)으로 불릴 정도로 그는 일에 매달려 산다. 지난 2009년 청와대 비서관 시절 대통령 주재 회의 도중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세 차례나 받았지만 회의 중간에 나오지 못해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1차관을 거쳐 국무조정실장에 올랐다.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관직을 떠났고, 3개월 뒤 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됐다. 농협금융 회장으로서 우리투자증권 인수에 성공했고, 2015년 3월 금융위원장으로 발탁돼 관가에 다시 돌아왔다.

그의 머릿속에 그림이 들어 있다

해운업과 조선업 구조조정 방안에 대해 무성한 추측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임 위원장은 "정부가 기업들을 붙이고 떼는 '빅딜'은 없다.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했다. "밑그림이 없는 것 아니냐" "칼을 휘두르지 않는 구조조정이 어디 있느냐"는 말도 나오지만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금융위 내부에서는 "구조조정 청사진은 착착 접혀서 위원장 머릿속에 들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세계 1위 조선소인 현대중공업은 별개로 하고, 2·3위인 두 회사의 사업 부문 간 주고받기나, 합병 가능성도 거론된다. 하지만 임 위원장은 이런 추측에 대해 "모든 일은 순서가 있다. 지금 할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선을 긋는다. 금융위 관계자는 "무대 위에서 1막이 진행 중이라고 2막, 3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켜보라"고 했다.

금융위기 때 '2인 3각' 이주열 한은 총재

임 위원장이 추진하는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선결 과제는 국책은행 자본 확충이다. 임 위원장은 "수출입은행에 출자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국은행에 도움을 청했지만, 이주열 한은 총재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래서 엇박자가 나는 것 같아 보여도 두 사람은 ‘코드’가 맞는 사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임 위원장과 통화신용정책담당 부총재보였던 이 총재가 정부와 한은 간 실무 채널이었다. 당시 두 사람이 만든 것이 한은이 산은에 대출해 시중 은행들을 지원한 ‘은행 자본확충펀드’다. 이 총재가 최근 “국책은행에 대한 출자(出資)보다 대출이 낫다”고 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하자”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임 위원장은 당시와 상황이 다르다고 본다. 이번에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을 지원해야 하고, 속도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금융위기 때가 아니라 외환위기 때처럼 하자”고 제안한 셈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은은 수은에 9000억원을 출자했다. 두 사람의 정책이 아직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만, 빠르고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최근 금융위 직원들은 임 위원장에 대해 “종일 어금니를 깨물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한다. 해운업과 조선업 구조조정이라는 대수술을 앞두고 있어 부담감이 큰 것으로 보인다. 평소 임 위원장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한다.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그만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런 그가 수술복을 챙겨 입고 막 수술실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