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5시 경기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카페거리. 독특한 디자인의 판교 카페건물들 사이에 눈길을 잡아 끄는 벼룩시장이 섰다. 판매자들이 손수 만든 액세서리와 인형, 도자기, 스카프, 방향제, 와인 등 다양한 수제품들을 파는 ‘플로잉 마켓(flowing market)’. 첨단 정보기술(IT) 업체들이 밀집한 판교 디지털 밸리와 어울리지 않을 것같은 이 벼룩시장은 어느덧 판교 밸리에선 빼놓을 수 없는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저녁 8시가 넘어가자 플로잉마켓 판매자들이 켜 놓은 형광등 불빛은 벚나무와 어우러져 판교의 밤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백현동 카페거리에 플로잉마켓 현수막이 걸려있다.

카페거리에서 열린 벼룩시장 플로잉마켓은 판교 주민들의 놀이터와 다름 없었다. 연인의 손을 꼭 붙잡고 데이트에 나온 커플,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즐기는 부부 등이 거리를 찾았다. 10살 된 딸아이와 함께 물건을 팔러 나온 판매자도 있었다. 직접 만든 수세미를 판매하러 나온 주부 김지영(41) 씨는 “딸아이가 함께 나오고 싶다고 졸라서 같이 나왔다”고 했다.

◆ 거리로 나온 수제 작품들

플로잉마켓은 매주 금요일 오후 4~10시, 토요일은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백현동 카페거리에서 열린다. 지난 2014년 10여명의 참여한 소규모 벼룩시장으로 시작해, 지금은 70여명의 판매자들이 모이는 판교 카페거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초창기 한 달에 두 번 열리던 시장은 이제 매주 2번씩 열린다. 여름철에는 100명 이상의 판매자가 모이기도 한다.

취미로 만든 제품을 팔려고 나온 주부나, 백화점에 납품하는 제품을 낮은 가격에 팔아 홍보 효과를 노리는 사업자, 부업으로 만든 수제품을 아예 사업 아이템으로 내놓으려는 사람들이 판매자들로 나섰다.

플로잉마켓 판매자들이 직접 만든 인형과 꽃, 스카프, 모자 등 다양한 제품을 전시·판매하고 있다.

플로잉마켓이 주민 삶을 바꿔 놓기도 한다.

1년 6개월 전부터 매주 플로잉마켓 판매자로 나선 독일인 부부 켈핀 말테(32) 씨와 바인만 이나(32) 씨는 직접 만든 독일식 잼과 와인을 들고 거리에 나왔다. 아내 바인만 씨는 직접 만든 잼과 와인이 플로잉마켓에서 인기를 끌자 자신의 본업인 학원 강사 일을 그만두고 지금은 박람회와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 참여하는 등 잼·와인 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다. 서울의 한 외국어고등학교에서 독일어 선생님으로 일하는 남편 칼테 씨는 매주 주말이면 판교 플로잉마켓에 나와 아내의 판매를 돕고 있다.

바인만 씨는 “매주 플로잉마켓에 참여하다 보니 단골손님이 20~30명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먹어보세요”하며 직접 만든 잼과 와인을 권했다.

독일인 켈핀 말테·바인만 이나 부부가 백현동 플로잉마켓에서 독일식 수제 잼과 와인을 판매하고 있다.

플로리스트 오영순 씨는 브랜드 홍보를 목적으로 플로잉마켓에 나왔다. 오 씨는 “백화점에 납품하는 3만5000원짜리 제품은 1만5000원에, 2만원짜리 제품은 1만원에 판매하고 있다”며 할인 비율이 50%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는 “제품을 싸게 파는 대신 플로리스트 교육생을 모으려고 한다”고 귀띔했다.

분당에서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보현(26) 씨는 취미로 만든 귀걸이 등 액세서리를 가지고 카페거리로 나왔다. 김씨는 “작년 가을에 한 번 참여하고 이번에 두 번째 플로잉마켓에 참여했다”며 “정기적으로 판매하시는 분들 중에는 백화점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제품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 판교밸리 IT 기업 직원들 “지갑도 잘 열어”

플로잉마켓을 찾는 손님 중에는 특히 판교밸리 IT 기업 직원들이 많다. 카페거리 근처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젊은 직장인과 근처 아파트에 거주하는 신혼부부 직장인들이 카페거리에서 식사나 커피를 즐기고 플로잉마켓을 구경하는 것은 이제 일상에 가까워질 정도로 친숙한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스타트업(신생기업) 스탠딩에그에서 근무하는 황수려(28) 씨는 남자 친구와 함께 백현동 플로잉마켓을 즐겨 찾는다. 그는 이날도 남자친구와 같이 플로잉마켓에서 수제 에스프레소 잼을 샀다. 그는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는 수제품이라 특별해서 샀다”며 “플로잉마켓 덕분에 카페거리에 활기가 넘쳐 좋다”고 말했다.

플로잉마켓이 열리는 카페거리에는 연인, 부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몰린다.

엔씨소프트 엔지니어 곽민철(33) 씨는 플로잉마켓 단골손님이다. 그는 “현대백화점이 생긴 이후 약속 장소를 주로 백화점 근처로 잡지만, 플로잉마켓이 열리는 날에는 주로 카페거리 쪽으로 장소를 잡는다”며 “오늘도 플로잉마켓이 열린다고 해서 카페거리를 찾았다”고 했다. 그는 “벼룩시장인 만큼 중간 유통비용 없이 저렴하게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에이디테크놀로지에서 근무하는 사원 이지호(31) 씨도 이날 아내의 손을 잡고 카페거리를 찾았다. 이 씨는 “자주 찾아오는 레스토랑이 카페거리에 있어 외식을 하고 플로잉마켓을 구경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백현동 카페거리의 플로잉마켓이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벼룩시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연인과 부부들이 자주 찾는 데이트코스로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또, 구매력과 생활 수준이 높은 판교 주민들이 주 고객이라, 구경 나온 손님들의 지갑도 잘 열리는 편이다. 해외 출장이 잦은 직장인들이 많아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특이한 제품이 잘 나가는 아이템이다.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김예슬(28) 씨는 “서울에서 열리는 보통의 벼룩시장의 경우 100명이 둘러보면 40명이 제품을 사는데, 백현동 플로잉마켓은 50명이 둘러보면 40명은 구매할 정도로 판교 주민들의 구매력이 높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씨는 “오늘 하루만 9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고 얘기했다.

바인만 씨도 “독일 전통음식인 오마스 콩스프레드 잼은 한국인 입맛에 맞지 않아 다른 벼룩시장에서는 찾는 사람이 많이 없는데 판교 카페거리에서는 유독 많이 팔린다”며 “해외로 출장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장향희(36) 플로잉마켓 진행팀장은 “백현동 카페거리는 다른 벼룩시장에 비해 값을 흥정하려는 손님들이 적다”고 했다. 실제로 이날 5시간 정도 지켜본 플로잉마켓에서 값을 흥정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 대(對) 현대백화점, 카페거리 상권의 연합군

카페거리 상인들은 무섭게 유동인구를 흡수하는 현대백화점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군으로서 플로잉마켓을 환영하고 있다. 지난해 8월 백현동에 현대백화점이 들어선 이후 기존 카페거리에서 영업하던 자영업자들은 유동인구 감소에 힘겨워하고 있다.

현대백화점 주변 상권. 가운데 현대백화점 판교점에서 북쪽에 있는 중심상업지구와 남쪽에 있는 백현동 카페거리는 500~1000m쯤 떨어져 있다.

백현동 카페거리 상인 최모(44) 씨는 “플로잉마켓에서 커피나 주스는 팔지 않아 판매업종이 겹치지 않고, 플로잉마켓이 열리는 날이면 오히려 유동인구가 늘어나기 때문에 좋다”고 말했다.

양지연(35) 플로잉마켓 대표는 “사업 초기부터 백현동카페거리상인번영회, 백현동카페거리건축주모임과 함께 사업 운영을 도모하며 공생을 꿈꿨다”며 “카페거리 상권 활성화가 플로잉마켓이 추구했던 목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쿠키, 음료, 의류 등 카페거리 상권과 겹치는 품목은 플로잉마켓이 팔지 않는다”고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