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한 이후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의 중앙은행들은 제로(0) 금리, 양적 완화, 마이너스(-) 금리 등 과거엔 볼 수 없었던 통화정책 카드를 꺼내 들었다. 위기 초반엔 정부와 중앙은행이 함께 위기 극복에 나섰으나 국가 부채가 늘어나면서 정부 재정정책의 뒷심이 떨어지자 중앙은행 총재들이 위기 극복의 전면에 더 나섰다. '한국 경제가 장기 침체의 위기로 접어들 가능성이 큰 데도 한국은행이 안 보인다'는 말이 나오는 우리나라와는 딴판인 것이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전 의장은 2008년 9월 금융회사들이 잇따라 무너지는 가운데 부도 위기에 처한 초대형 보험사 AIG에 8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넣어 살려 냈다. AIG는 보험회사라서 일상적인 위기 때라면 중앙은행이 구제금융을 넣을 수 없었지만, 워낙 비상 상황이고 보험사가 파산하면 많은 가계가 고통을 받기 때문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 후 버냉키 의장은 기준 금리를 제로 금리로 낮췄고, 그래도 경제가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자 중앙은행이 직접 시장에서 장기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등을 매입해서 돈을 푸는 '양적 완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2008~2014년 동안 양적 완화로 쏟아부은 돈만 4조5000억달러(약 5100조원)에 달한다. 버냉키의 정책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찬반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일자리가 생기고 애플·아마존·구글·페이스북 등 혁신 기업들이 왕성하게 성장하면서 힘을 얻었다. 2010년 10월 10%까지 치솟았던 실업률은 최근 5% 내외로 떨어졌고, 위기 때 사라졌던 864만개의 일자리는 2014년을 기점으로 원상 회복됐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2012년 그리스 위기로 유로존이 쪼개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을 때 "ECB는 유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는 말 한마디로 시장을 안정시켰다. ECB는 2014년엔 주요국 중앙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도입해 돈을 푸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 후에도 경제 회복이 지지부진하자 미국의 뒤를 이어 작년 3월부터 양적 완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유로 지역 경제는 올해 1분기 성장률이 미국(0.5%)보다 높은 0.6%를 나타내는 등 반등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도 2013년 취임 후 양적 완화를 연간 80조엔 규모로 확대한 데 이어 올해 초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는 등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꺼내 들고 전면에서 경기 회복을 지휘하고 있다. 다만 일본 경제의 구조 개혁이 더딘 탓에 돈 풀기 효과가 반감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