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구조조정에서 한국은행의 역할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기 위해 한국은행에 연일 SOS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 경제를 굴리는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한국은행은 제대로 응답하지 않고 있다. 정부 요청을 사실상 거부하던 그동안의 입장은 바꿨지만, 여전히 구조조정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은 외면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명분에 매달려 정부와의 협력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정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한은은 수출입은행 자본 확충(지분 확대)에 직접 나서 달라는 정부의 요청에 대해 "정부에 돈을 빌려줄 테니 정부가 알아서 하라"는 일종의 역(逆)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한은이 사주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국채 발행은 국책은행 자본 확충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안 편성과 마찬가지로 국회 승인이 필요해 구조조정의 속도를 내기 어렵다. 한은과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는 오는 4일 한은의 국책은행 지원 방안에 대한 태스크포스(TF) 첫 회의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정부와 한은의 입장 차가 좁혀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부가 한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는 해운업과 조선업이 기간산업이라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대규모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으로 두 국책은행이 이들 업종에서 발생한 손실을 떠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은행 건전성이 악화돼 자본금을 확충해 주어야 한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려면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국회 통과도 불투명하다.

이에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1일 TV에 출연해 구조조정 재원에 대해 "가능한 재정과 통화 정책 수단의 조합을 생각해보고 있다. 딱 하나의 방법을 쓰기보다는 폴리시 믹스(policy mix·정책 조합)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재정 정책과 한은의 통화 정책을 동시에 써보자는 뜻이다.

하지만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현재의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칠 가능성도 있다. 해운업의 경우 5월 중순까지 해외 선주들과의 용선료(배를 빌리는 비용) 인하 협상이 불발되면 양대 해운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조선업도 수주(受注) 절벽에 시달리고 있어 급박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