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주요 제조업 기업의 최고기술책임자(Chief Technology Officer· CTO)들은 한국의 산업 경쟁력의 현재는 물론 미래마저 비관적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로 중국의 추격과 혁신 역량 부족을 꼽았다. 조사 대상 CTO 57명 중 무려 47명(82.5%)이 "중국의 기술력을 체감하고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합금전문기업 대창의 윤의한 기술연구소장은 "합금 제조에 필수적인 첨가제 분야는 지금까지 유럽 기업들의 독점 분야였는데 최근 중국 업체의 제품이 등장했다"면서 "장기간의 연구·개발(R&D)과 경험 기술 축적이 필요한 분야를 중국이 단기간에 따라잡아 버렸다"고 말했다.

중국의 추격과 혁신 역량의 부족

이번 설문은 본지가 국내 기업들의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KOITA)와 공동으로 진행했다. 국내 제조업 기업의 구성 비율을 감안, SK· LG·LS 등 대기업 11개와, 매출액 5000억 이상~1조원 미만 중견기업 8개, 중소기업 38개 등 총 57개 기업의 최고기술책임자 혹은 기업연구소장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산업 경쟁력에 대한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요 원인으로는 '중국 기업들에 기술력 면에서도 추월당할 상황', '수익성이 떨어지는 현재의 사업을 대체할 혁신적인 신제품·신기술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CTO들은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기술 경쟁력 격차에 대해 절반(49%)에 해당하는 28명이 '이미 우리를 앞섰거나 격차가 있더라도 1년 미만'이라고 평가했다. '우리가 3~5년 앞섰다'고 평가한 CTO는 8명(14%), '5년 이상 앞섰다'고 평가한 CTO는 3명(5%)뿐이었다. LS산전의 이상호 고문은 "중국은 우리가 못하는 로켓도 만들어 쏠 만큼 기술적 역량이 있는 나라"라며 "우리가 가전·IT·통신 등에서 앞섰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들은 중국의 부상이 외적 요인이라면, 내부적으로 산업 생태계의 혁신 역량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저조한 산업 생태계의 혁신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급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CTO들은 중소·중견기업의 연구개발 역량 강화(29%)를 첫손으로 꼽았다. 한 중소기업 연구소장은 "우수한 요소 기술을 갖춘 중소기업들을 키우려면 대기업에 종속되지 않는 전문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법제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CTO들은 산업 생태계의 혁신 역량을 끌어올릴 방안으로 정부의 확실한 기술 혁신 청사진(17%)과 산학연(産學硏) 연구 시스템 개혁(17%), 공대 교육의 혁신(13%)도 주문했다. 효성중공업 박승용 연구소장은 "정부가 대학과 국가연구소를 직접 지원하다 보니 대학과 국가연구소가 (기업을 안 보고) 정부만 보고 일을 한다"면서 "기업도, 대학도 문제가 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대학 교육과 사회적 분위기 혁신해야

CTO들은 우리나라 대학의 이공계 교육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체 응답자 중 54%가 '과거와 비교해 이공계 출신 연구자들의 역량이 떨어진다'고 답했고, '예전보다 낫다'는 응답은 19%에 불과했다. 이들이 매긴 이공계 출신자들의 역량은 과거의 68% 수준으로 평가됐다. LG화학 조원석 기술 고문은 "연구·개발 인력들이 일을 대하는 열의나, 문제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주인의식은 과거에 비해 오히려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리나라의 창업 생태계에 대한 걱정에도 반영됐다. 한국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 테슬라 같은 혁신 벤처들이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CTO들은 '혁신적 기술과 창의적 마인드를 지닌 기술 인재가 국내에 없다'(27%·복수 응답), '대기업 중심의 산업 생태계에서는 벤처나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힘들다'(26%),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나 제도가 없어 재기가 어렵다'(26%)고 답했다. '장기적 안목으로 투자하는 제대로 된 벤처캐피털이 없기 때문'이라는 응답(12%)도 있었다.

한 중견기업 CTO는 "대기업이 좋아하는 스펙에 맞춰 틀에 찍어낸 듯한 인재들로 할 수 있는 것은 대기업을 흉내내는 것뿐"이라며 "대학 교육의 틀과 함께 사회적 분위기를 혁신하지 않으면 창업도, 기술 경쟁력 강화도 모두 먼 얘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