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양적완화'가 되살아났다. 논쟁의 불씨를 재점화시킨 주체는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다. 박 대통령은 지난 26일 한국형 양적완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후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언급한 한국판 양적완화의 목적이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국한되며 이를 위해 한국은행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즉 기업 구조조정 작업에 필요한 '실탄'을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 양적완화를 통해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지난 총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내놓은 공약으로 신성장동력 육성, 기업구조조정과 가계대출 부담 완화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고 가계부채를 해소하자는 내용인데, 구체적으로 한은이 산업은행의 산업금융채권(산금채)과 주택금융공사의 주택담보대출증권(MBS)을 직접 인수하는 방식이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지 하루 만에 새누리당의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은이 기존 수출입은행 뿐만 아니라 산업은행에도 출자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당초 새누리당이 4·13총선에서 참패하면서 한국형 양적완화는 동력을 잃어가는 모습이었지만, 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이같은 발언으로 논쟁에는 다시 불이 붙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중앙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을 3년 만에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질문에 "저는 이건 한번 우리가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야 된다는 입장"이라며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추진이 되도록 힘을 쓰겠다"고 말했다.

◆ 한은 발권력 요구한 靑, 한국형 QE 논쟁에 다시 불 지펴

청와대는 지난 27일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판 양적 완화' 긍정 검토 발언과 관련해 우리가 하는 양적완화는 선별적으로 구조조정이라고 하는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춘추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양적완화 방법은 한은이 산은 채권을 인수하는 방법이 있고 한은이 (산은에) 직접 출자할 수도 있다"며 "새누리당이 추진하는 한은법 개정안에 한은이 산은에도 직접 출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넣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산은이 자본력을 확충하게 되면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실채권을 처리할 여력이 커지게 된다. 산은은 작년 말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14.2%로, 최근 3년 사이에 2조70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내면서 본격적인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본확충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이 관계자는 "한은은 현재 정부 보증채만 인수하게 돼 있기 때문에 산은 채권을 인수하려면 한은법을 개정해야 한다"면서 "한은의 경우 수출입은행에는 현재도 출자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수은의 BIS 자기자본비율은 9.89%다. 부실 채권을 털어내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BIS 비율이 낮아서 자본 확충이 절실한 상황이다. 수출입은행의 위험가중자산은 120조원이고 자기자본이 11조원이어서, 자기자본을 현재보다 5조원 이상 확충해야 BIS 비율을 14%로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와대는 재정 투입보다 한은이 돈을 찍어내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이 관계자는 "산은과 수은에 대한 출자는 재정으로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하거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며 "한은이 (출자)하는 게 빠르다"고 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한은의 '국책은행 출자' 요구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일단 한은법 개정은 여소야다(與小野大) 정국 속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청와대와 정부가 야당의 동의나 사전협의 없이 구조조정 방안의 일환으로 이런 방식을 던진 것이라 야당이 쉽게 협조해 줄 지 알 수 없다.

한은도 내심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한은 관계자는 "결국 발권력을 동원해 구조조정을 위한 실탄을 지급해 달라는 주장인데, 구조조정의 범위나 강도가 결정되기 전에 발권력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한은 내부에서는 현 시점이 과거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비상수단을 동원해야 할 때라는 국민적 공감대와 입법부의 동의가 전제돼야 발권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정서가 강하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19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구조조정 지원에 대해 "법적 테두리와 중앙은행 원칙 안에서 하겠다"고 밝혀 양적 완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분명히 했다.

◆ 전문가들 의견 엇갈려 "구조조정 시급, 절실한 상황" vs "최후의 수단 돼야"

전문가들 간에도 한국형 양적완화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팽팽하다. 전문가들은 기업 부실을 정리하고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점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구조조정을 위한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과거 새누리당이 공약한 양적완화나 청와대가 재차 꺼내든 양적완화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통상적 양적완화라고 할 수 없다"면서 "결국 구조조정 촉진을 위해 정책금융을 동원하겠다는 방식인데, 구조조정의 시급성을 감안하면 이 정책은 절실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양준모 연세대 교수는 지난 27일 한국형 양적완화를 주제로 열린 한 토론회에서 "한은의 목적 중 하나가 금융시장 안정화라는 점에서 이번 한국형 양적 완화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면서 "구조조정 자금 수혈은 은행들이 보유한 부실채권의 불확실성을 줄여줘 금융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양적완화를 통해 금융시장 안정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양 교수는 특히 "부실채권을 일정한 비율로 평가절하하고 유동화시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 가계대출은 아직도 만기 시 대규모로 대출 금액을 상환해야 하는 비율이 높아 안정성에 취약한 구조"라며 "이를 20년 원리금 상환 대출로 전환시켜 가계부채 안정성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한국형 양적 완화을 '과잉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양적완화는 금리를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정책"이라며 "한국 경제가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쓸 만큼 절박한 위기에 처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 교수는 '한은의 산은 채권 매입'을 통한 한국형 양적완화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그는 "기업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며 조선·해운산업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산은"이라며 "구조조정 능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산은에 자금을 대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논의의 순서가 잘못됐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구조조정이 아무리 시급하다고 해도 한국형 양적완화부터 논의할 시점이 아니다"라면서 "한은은 마지막에 나서야 하는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인데 처음 논의부터 한은을 끄집어내면 앞으로 구조조정이 있을 때마다 발권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추후 정책운용이 굉장히 어려워 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양적완화는 경제 비상상황에 마지막에 동원하는 수단"이라면서 "대통령이 양적완화를 언급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현재 상황이 위기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과연 이게 정부가 대외적으로 주려는 신호가 맞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