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25일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에 한진해운 자율협약(채권단의 기업 공동 관리)을 신청했다. 경영권 포기 각서와 기존 계획보다 3000억원을 더 마련하겠다는 자구 노력 방안까지 제출했지만, 신청서를 접수시키지도 못했다. 산은은 "경영 정상화 세부 방안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며 보완을 요구했다. 지난 3월 자율협약에 들어간 현대상선에 이어 한진해운까지 떠안아 양대 국적 해운사의 구조조정에 나서야 할 입장인 채권단이 과감하고 신속한 구조조정을 위해 한진해운 측에 백기(白旗) 투항을 요구한 것이다. 채권단은 정부와 조율을 거쳐 본격적인 구조조정 방안 마련에 들어갈 채비다.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한진해운이 지난 2011년 발행한 1900억원의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는 오는 6월 말까지 1차 수술을 마무리해야 한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두 회사 모두 그리스, 영국 등의 선주(船主)들과 진행 중인 용선료(선박 임대료) 인하 협상에 성공해야 채권단의 추가 지원과 사채권자(社債權者·회사채 등을 보유한 채권자)의 채무 유예 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주채권은행인 산은은 다음 달 중순까지 용선료 협상 대상인 선주들에게 최종 구조조정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 방안을 선주들이 수용해야 용선료 인하가 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해운 물류 대동맥인 양대 컨테이너사의 구조조정 골든타임(응급 환자의 생사를 가르는 시간)은 불과 한 달 남짓 남았다.

침통한 해운업 관계자들 - 2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해운 대책 회의에 참석한 김영무(왼쪽) 한국선주협회 상근부회장과 우예종(왼쪽에서 둘째) 부산항만공사 사장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이날 회의에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좌초 위기에 몰린 가운데 급박하게 돌아가는 글로벌 해운시장 재편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해운업 외에도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현대중공업 등 조선 '빅3'가 지난해 8조원대의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한 조선업도 구조조정 데드라인에 직면했다. 금융 당국 고위 관계자는 "내년 초부터 대선 바람이 불 테니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은 아무리 늘려 잡아도 올 연말까지 8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응급 환자들이 꼬리를 물고 있지만, 수술실 환경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정부는 작년 10월부터 금융위원장이 주재하는 '산업 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협의체'를 출범시켰지만 정치권 외풍을 피하기 위해 총선 이후로 시기를 미루는 대신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일 방침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예상과 달리 4·13 총선은 여소야대를 만들어냈다. 구조조정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의 협력이 필수 조건이 됐다.

야당의 협력이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전망과 사공이 늘어나 배가 산으로 갈 것이라는 비관론이 엇갈린다. 속도는 내지 못하고 경제 논리를 벗어나 실업 대책 등에 시간을 보내면서 골든타임을 흘려보낼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야당이 일일이 간섭하고 실업 대책에만 몰두한다면, 기업 회생이라는 목표는 희미해지고 구조조정의 판은 깨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야당이 전통적인 지지층인 노조의 반발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면서 정부·여당과 협력 구도를 만든다면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노조 설득이 구조조정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야당이 이 역할을 맡아줄 것인지, 또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를 분리해서 접근할 수 있는지 등이 기업 구조조정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